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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부장/American Study

by 지지에이치 2006. 6. 2. 0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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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경원: 왜 미국에서 사회주의는 실패했는가 (2000.05.01)


[월간 에머지] 2000.05.01


이경원 대진대 국제학부 교수


우리는 과거의 경험을 통해 배운다. 그래서 역사는 우리의 좋은 교사가 되기도 한다. 우리는 직접 경험하지 못한 것들은 간접경험을 통해 배우기도 한다. 국가도 그렇다. 이는 우리 사회가 직접 경험하지 못한 것은 다른 나라의 경험을 통해 배울 수 있음을 암시한다. 그런 의미에서 미국의 경험은 우리에게 많은 것을 시사한다.


남북전쟁은 전통적으로 농업위주인 미국 경제에 큰 충격이 되었고, 그 이후 19세기 후반을 거쳐 20세기 초에 이르는 동안 미국 경제는 급속한 산업화 과정을 겪으며 세계 제일의 경제대국으로 부상하게 된다. 이런 과정에서 미국과 미국인들이 겪은 빈부격차로 인한 갈등 또는 노사갈등은 오늘날의 미국을 보고서는 도저히 상상이 되지 않는 고통스런 것이었다. 그러한 혼란과 고통을 겪으면서도, 더구나 당시 세계적으로 세력을 확장해가던 사회주의의 도전을 받으면서도, 미국 경제는 자유시장 경제체제의 기본골격을 유지해왔으며 20세기 중반에 들어와서도 세계적으로 그 세력을 확장해가던 공산주의로부터 여러 다른 나라까지 지키는 데 큰 공헌을 했다.


물론 한때 뉴딜New Deal정책 이후 진보주의의 세력확장이 있기도 했지만 뿌리 깊은 보수주의 전통은 저변에 살아 있어 20세기 말에 그 입지를 강화하고 21세기로 접어든 현재 미국 경제호황의 기초가 되고 있기도 하다.


우리 나라는 1960년대까지만 해도 농업위주의 세계 최빈국 중의 하나였다(일인당 GNP가 1960년에 $79, 1965년에 $105였음). 그러나 그 이후 특히 70년대 들어 급속한 산업화의 과정을 겪으면서 급속한 경제성장을 거듭하며 GNP 기준 경제규모 제17위(98년기준)의 나라가 되었다. 물론 IMF 구제금융 등을 당해 어려움을 겪기도 했지만, 그 동안의 경제적 성취는 괄목할 만한 것이었다.


그러나 이런 과정에서 발생한 빈부격차의 심화로 인한 사회갈등, 빈번한 노사분규, 자주 비난의 대상이 되고 있는 일부 계층의 높은 소비생활, 뇌물수수로 점철되어 있는 정경유착에 관한 정치·경제·사회적 물의 등은 우리 사회의 지각 있는 인사들의 걱정 어린 관심사가 되어 있고, 해결방안에 대한 논의가 언제나 무성하다.


이에 1세기라는 시대적 격차는 있지만 미국이 100년 전에 겪은 산업화와 그로 인한 여러 문제를 어떻게 헤쳐나갔는가를 검토하는 것은 우리에게 참고가 되는 매우 의미 있는 일이다. 특히 당시 서구 산업사회에서 그 세력을 확대해 가던 사회주의가 미국에서는 流産됐다. 무엇이 미국에서 사회주의의 유산을 초래했는가는 매우 흥미로운 사실이다.


이런 관점에서 다음의 몇 가지 질문을 제기해 봤다. 첫째, 미국의 산업화 과정에서 발생한 경제적 변화와 빈부격차의 심화는 어떠했는가? 둘째, 이로 인해 노동자를 중심으로 한 없는 자Have-nots들은 어떤 활동을 전개했는가? 셋째, 노조형성, 파업, 계급투쟁 등에 대해 미국사회는 어떻게 반응했는가?


1. 미국의 산업화와 심화된 빈부의 격차


남북전쟁(1861-65) 이후인 1870년부터 제1차 세계대전(1914-18) 후인 1920년까지의 50년은 미국에 참으로 많은 변화가 있었던 반세기이다. 1870년 미국의 산업구조는 농업 인구가 다수를 차지하는 가운데 비농업의 경우도 자영업이 주종을 이루고 있었다. 그러나 1920년에 와서는 농업종사자가 전체노동자의 11.7%, 농업을 제외한 분야의 자영업자는 전체 인구의 20%에 불과하게 된다. 이 50년 동안 제조업에 종사하는 노동자의 수는 250만 명에서 1,120만 명으로 늘어나, 전체 노동인구의 40%를 차지하게 되었다.


이러한 변화는 경제 사회적으로 큰 변화를 의미하는데, 1859년에 비해 1914년에 미국의 제조업의 총생산액이 18배, 1919년에는 33배로 증가한 것으로 나타난다. 그리고 미국이 제조업 생산 면에서 1840년에는 세계 제5위에 지나지 않던 것이 1860년에는 제4위로, 그리고 1894년에는 제1위의 제조업 국가로 부상하였다.


이와 같은 경제성장은 소수의 부유층을 형성하게 돼 미국 내에 빈부격차를 심화시켰다. 즉 Charles Spahr의 계산에 의한 1890년의 소득분포를 보면, 1천2백만 가족 중 약 98%는 연간소득이 1,200 달러 이하였으며, 이들의 평균소득은 당시의 빈곤선 이하인 380달러였다고 한다. 그리고 전체 인구 중 부유층 상위 1%의 소득이 저소득층 50%의 소득 총계보다 더 많았으며, 그 재산은 나머지 인구 99%가 소유한 재산보다 많은 것으로 나타났다. 그리고 1914년 산업관계위원회The Commission on Industrial Relation의 자료에 의하면 연간 1백만 달러 이상의 소득을 올리는 44명의 총소득은 500달러를 버는 10만 명의 소득보다 많았다고 한다. 이 역시 당시의 빈부격차를 잘 드러내는 자료이다.


빈부격차를 나타내는 또 하나의 간단한 예로, 1913년 당시 미 의회의 보고에 의하면 John D. Rockefeller와 J. P. Morgan의 재산이 미시시피강 서쪽에 있는 모든 재산을 합한 것보다 많았다고 한다. 이외에도 1880년대 말의 경제관련 자료를 보면 노동계층의 어려움이 잘 나타나 있다. 즉 빈곤소득 수준인 연봉 500달러 이상을 겨우 유지하는 노동자는 45%였고, 40%의 노동자는 부인과 아이들의 노동에 의한 부가 소득 덕분에 겨우 셋집 등에서 살아가는 형편이었으며, 약 15%만이 숙련공으로서 연간 800 내지 1000달러의 소득으로 살아가고 있었다.


이런 추상적인 숫자보다 당시 저소득층의 생활상을 묘사한 글을 보면 이들의 생활이 얼마나 어려웠던가를 짐작할 수 있다. 예를 들자면 1884년 당시 보스턴 시내에 늘어나고 있던 매춘에 관한 보고서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여자가 일주일에 3∼4 달러씩 받고 하루종일 열심히 일을 한다는 사실이 그녀가 매춘을 생계수단으로 하지는 않는다는 데 대한 충분한 증거가 된다. 여자들이 하루종일 열심히 일을 하고 동시에 매춘부가 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이 말을 뒤집어보면 당시 생활고를 이겨내기 위하여 많은 여성들이 매춘에 나섰음을 암시하고 있다.


이외에 1901년 발간되어 많은 독자들에게 충격을 주었던 Jacob Riis의 《다른 반쪽은 어떻게 살고 있나How the Other Half Lives》를 보아도 빈곤계층의 어려움을 생생하게 떠올릴 수 있다. 그 한 구절을 보자. “가족의 상태를 보면 너무도 비참하다. 남편, 아내 그리고 세 아이들이 지붕 틈으로 추운 겨울바람이 들이치는 데서 살고 있다. 방에는 가구가 거의 없고, 부모는 바닥에서, 좀 자란 아이들은 상자에서, 어린 아기는 방구석에 달아맨 숄에서 잔다.” 그 외에도 빈곤층의 비참한 삶을 묘사한 자료는 많다.


이에 반해 부유층의 삶은 지극히 대조적이다. 금박 투성이의 고급 요트에 모든 가족과 친지를 대동하고 여러 나라를 순방하는 해외여행을 한다거나, 파티를 할 때는 손님들의 음식에 보석을 숨겨놓고 보물찾기 소동을 벌이는가 하면, 딸의 생일파티에는 생일 케이크 속에 숨어있던 무희가 튀어나와 노래하고 춤을 추는 등 호사스러움이 극에 달하기도 했다.


2. 늘어나는 노동계층의 불만과 노동자단체의 활동


빈부의 격차 외에도 산업화에는 경제발전에 많은 공헌을 한 노동자들로부터 반발을 사는 몇 가지 변화가 수반되었다. 상대적 박탈감, 기계화에 따른 숙련노동의 무용지물화, 그리고 이에 따른 소득 및 생활수준의 하락이 노동자의 불만을 야기하는 요인이 됐다. 그러나 이 외에도 여러 다른 요인들이 있다. 산업화로 인해 멀어진 노사간의 인간적 관계, 불만있는 노동자들의 탈출처였던 서부 공유지의 소진, 노동자의 공급과잉, 장시간 노동과 빈번한 산업재해, 해고의 용이성과 미비된 사회보장제도 등이 노동자들의 불만을 부추겼다. 이에 노동계는 위와 같은 불만요인을 해소하기 위해 활발한 노동운동을 전개하게 된다. 물론 산업화 이전에도 노조의 형성과 노동자들의 파업이 있었지만, 대기업과 대도시의 급성장을 동반했던 산업화는 미국 사회에 더욱 큰 변화를 가져왔다.


산업화는 노동자와 사용자 모두에게 큰 변화를 가져왔는데, 그 대표적인 것은―독일의 사회학자 Ferdinand TÖnnies의 견해를 빌리자면―공동사회Gemeinschaft에서 이익사회Gesellshaft로 변했다는 점이다. 관습과 전통 그리고 개인교섭을 통해 사회통제가 가능하던 것으로부터 사회의 관리가 비개인적이고 기계적으로 이루어지며 법적 조치와 관료적 구조가 지배하는 사회로 변한 것이다.


이에 따라 노동자들도 자구책으로 노조를 결성하게 되었고, 특히 남북전쟁 후 산업화 시기에는 크게 세 가지 형태의 노동자 조직이 등장했다. 그 첫째는 1869년에 형성된 노동기사단The Noble and Holy Order of the Knights of Labor과 같이 전 산업을 망라한 노조이며, 둘째는 훗날 미국노동자연합American Federation of Labor으로 묶이게 되는 직능노조들, 셋째는 마르크스의 국제노동자협회International Workingmen’s Association와 같은 급진적 사회주의자 단체나 혁명단체들이다. 이 가운데서 첫째 형태와 셋째 형태는 실패하고 둘째 형태만이 성공적으로 살아남는다. AFL-CIO라는 형태로 지금도 존속할 만큼 AFL이 성공적이었던 이유는 AFL의 훌륭한 지도자들과 조직경영관리의 우수성도 있었지만, 미국이라는 사회의 문화, 정치, 경제적 토양의 특수성 때문인 것으로 생각된다.


1) 노동기사단의 성공과 실패


기사단은 1869년에 창단됐으나 실제로 활동을 본격화한 것은 1879년이다. 처음에는 필라델피아에서 일종의 친목단체인 재단사 직능조합으로 출발했다. 1873년 공황 때 다른 노조들은 와해되었지만 기사단은 그 비밀스러움 덕분에 살아남아 1878년 호황기에 조직이 확대, 공개되어 전국화 되었다. 1881년에는 기계공 출신으로 스크랜튼市 시장을 지냈던 노조운동가이자 명연설가였던 Terrence Powderly의 지도 아래 조직을 완전 공개하여, 은행원, 변호사, 술장사, 투기꾼, 노름꾼, 증권중개인 등을 제외한 모든 직종의 노동자에게 문호를 개방했다. 이러한 과정에서 기사단은 직종, 빈부, 민족, 종교, 인종, 성별을 초월하여 공동의 사회적 형제애에 기초한 단체로 성장하게 된다. 그리고 노동의 미덕, 기회의 균등, 지역사회활동을 강조하는 당시의 공화주의적 이상을 구체화하려고 한다. 이들은 1884년 총회에서 “우리는 기존의 산업체제와 노동에 있어서 급진적 변화를 원한다 … 기존의 산업체제와 전쟁을 하는 태도로 임해야겠다”는 결의문을 채택하기도 했다. 이들이 반대하는 것은 사실 산업주의 자체가 아니라 그 체제였다. 주로 교육과 선동기구로 노조의 기능을 동원했으며, 누구에게나 유익한 단체로 인식되어 한때 회원 수 50만에 이르는 거대한 기구가 되기도 했다.


그러나 조직이 거대해질수록 그에 따르는 경영관리가 어려워지고, 기사단이 공약을 지키지 못하는 일이 발생함에 따라 자연히 회원이 감소하게 되었다. 더구나 파업을 주도하는 과정에서, 특히 시카고 헤이마켓 사건 때의 폭발사고는 기사단의 신뢰성에 결정적인 흠을 남겨 그 세력이 더욱 약화되었으며 1892년 인민당과의 제휴로 종말을 고하게 되었다. 기사단은 회원간의 결속력을 강조했지만, 기사단이 추구했던 것처럼 만인을 위한 보편적 조직으로서의 결속력은 다져지지 않았다. 동시 달성이 워낙 어려운 결속력solidarity과 보편성universality을 동시에 추구하려다 보니 그 성취가 어려웠던 것이었다. 즉 노동자면 누구나 회원이 될 수 있었기 때문에 그 구성원의 다양한 욕구를 동시에 충족시키기 어려웠고, 다양한 구성원들을 함께 결속시키기도 어려웠던 것이다. 어느 단체든 결속력이 없으면 와해되기 마련이다.


2) 미국노동자연합의 성공


기사단에 비해 관리가 잘 되었고 현실감 있는 지도 덕분에 합리적으로 운영되던 AFL은 성공을 하게 된다. AFL의 역사를 읽어가노라면 AFL은 회원들의 열망에 따라 그들의 관심사에 맞게 봉사한 ‘진취적’이고, ‘현실적’이고 ‘성공한’조직이라는 인상을 받게 된다. 사실 AFL의 정책과 행동을 보면 그 성공의 이유를 알 수 있는데, 그 특징은 다음과 같은 것들이다.


첫째, AFL 노조는 산업자본주의를 받아들였다. 즉 사용자측에서는 노조에게 임금과 노동조건, 직업의 안정에 대해 협상할 수 있는 권한을 인정하고, 노조로부터는 마음속으로부터 자본주의제도를 뒤흔들지 않겠다는 것과 비록 노동계층의 결속력에 손해가 되더라도 노동계약을 준수하겠다는 약속을 받아냈던 것이다. 둘째, AFL 노조는 정당정치를 배격하고 경제활동에만 전념하는 조직으로 남았다. 다시 말해 ‘생계를 위한 노조주의bread and butter unionism’를 고수했다. 셋째, 소위 개혁성향의 지식인과 중산층 인사들의 충고나 지도를 배제했다. 노조는 사용자와의 관계에서 다만 노임과 노동시간 등의 노동조건 개선이나 산업재해를 줄이기 위한 노동안전성 추구에 그 노력을 집중했던 것이다. 즉 AFL은 명분보다 실리를 추구했으며, 정치적이기보다 경제적 논리로 접근했고, 개혁성향의 지식인들과도 거리를 둔 채 노동자의 현실적 실익 추구를 도모했던 것이다.


AFL은 처음 1881년에 미국-캐나다 노조연합회The Federation of Organized Trade Union of the U.S. and Canada로 창립되었으나 그 활동은 미미했다. 그러던 것이 1886년에 AFL로 개명하고 기사단에 실망한 많은 사람들이 AFL에 합류하며, Samuel Gompers가 회장이 되면서 그 활동이 활발해졌다. 1892년에 회원노조가 13개에서 40개로 늘어났고 1897년에는 관련된 총 회원이 447,000명에 이르기도 했다. 초기에 AFL은 기사단과 달리 파업을 공개적으로 지지하고 나섰으나, 실제 파업자들을 금전적으로 지원할 재원은 없었다.


지도자인 Gompers는 표현에 있어서는 매우 투쟁적인 언어를 구사했으나, 실제 노사분규 시에는 주로 온건한 화해의 태도를 취했다. 그리고 AFL 소속 노조들은 전체 노동자들의 형제애와 결속을 주장하면서도 실제로 그 회원구성을 보면 대부분이 소수의 형편이 나은 노동자들이었다. 즉 노동자면 누구나 회원이 될 수 있었던 것이 아니고 비숙련공, 비백인, 여성 등을 제외한 배타적 노조를 운영했다.


이처럼 노조가 배타적인 이유는 그들의 직능범위를 좁게 함으로써 노동시장의 장악을 쉽게 하고 사용자에 대항하는 교섭력을 발휘하기 쉽게 하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이들 직능노조craft unions들은 스스로 고용주에게 굽신거리기 싫어하는 독립심 강한 백인들의 안식처로 불리워지기도 했듯이, 고용주에게 고분고분한 것으로 여겨졌던 비백인이나 여성에게는 회원자격을 주지 않았다. 이에 대해 Friedrich Engels는 1892년에 “노조에 가입한 노동자들은 귀족같은 자리에 앉아, 가능하면 극소수만이 귀족적 노조에 가입토록 하고 이민자들에게 나쁜 일자리를 남겨 놓는다”라고 지적하기도 했다.


이러한 인종적, 성별적으로 배타적인 조직으로 인해 숙련공들이 이익을 보고 있었지만, 노조지도자들은 종종 회원들의 편협한 우월주의적 태도에 합세하지는 않았다. 그들은 회원들에게 흑인과 여성들을 노동운동에 합류시키라고 요청했으며, 그렇지 못하면 그것은 노동운동의 인도주의 원칙에 위배될 뿐 아니라 노동계급을 분리시켜 고용주에게만 유리하게 될 것이라고 경고하기도 했다. 그러면서도 중국인 노동자를 위주로 한 아시아계 이민은 회원이 될 수 없도록 하였다. 이처럼 AFL이 성공이라고 할 만큼 유지되고 발달되어 온 데는 AFL이 보수적이며, 기회주의적이고, 선택적으로 배타적이라는 점이 한 몫을 했다. 이에 더해 정치를 피하고, 필요할 때는 자본가들과 협조하며, 높은 회비로 기금을 조성해 파업을 지지하고, 엄격한 규율과 건전한 정책으로 대중의 신뢰를 얻었다. 그리하여 AFL에 대한 적대감이나 어려웠던 시기, 그리고 경쟁 단체들을 이겨내며 1924년에는 거의 3백만에 이르는 회원을 거느리게 됐던 것이다.


3) 급진적 사회주의 그룹의 부침


미국에는 사회주의와 공산주의의 비교적 오랜 역사가 있어왔다. 사실 19세기 초 미국 내에서는 유토피아적 사회운동이 번성했었다. 유토피아 사상가의 영향을 받았건 또는 기독교의 영향을 받았건 간에 미국의 사회 경제적 여건이 유토피아 사회 건설이라는 실험을 하기에 적합했기 때문이기도 했다. 넓은 토지에 비해 부족한 노동력, 얻기 쉬운 광활한 토지, 유럽의 구제도로부터의 자유로움 등이 이상향 건설 실험에 좋은 여건을 제공했다.


이들 이상향 공동체 실험은 미국의 급진적 좌파 운동과 나아가 마르크스-엥겔스에게도 큰 영향을 미쳤다는 연구가 있기도 하지만, 19세기 후반에 들어 쇠퇴하면서 단명했다. 이처럼 당시의 미국인들은 사회주의나 공산주의를 생각할 때 유토피아적 실험이나 몰몬교도들의 공영권Mormon Commonwealth 등을 연상하는 정도였을 뿐, 이것을 노동문제와 연관지어 생각하지는 않았다. 그러던 것이 1870년대에 들어와서는 노동여건이 무척이나 열악했던 탄광에서 폭력을 자행하는 비밀조직으로 나타나기도 했고, 칼 마르크스의 가르침에 따라 미국에 사회주의를 정착시키려는 시도로 이어지기도 했으나 성공적이지는 못했다.


그 후 1905년에 세계산업노동자동맹Industrial Workers of the World이 조직되었는데, 이것은 급진적 노동운동가, SLP(Socialist Labor Party)와 SPA(Socialist Party of America)의 좌익 사회주의자, 직능노조에 불만이 있는 노조원들이 1905년 시카고에 모여 만들어 낸 급진주의적 노조이다. 이 때 이들은 그 회의를 미국 노동계급의 대륙회의라고 부르며, 대표자들은 AFL과 경쟁할, 직능별이 아니라 산업별로 노동자를 묶는 현 사회제도와 정부가 전복되도록 자본가들과 지속적 계급투쟁을 할 전국적 노동단체를 만들 것을 투표로 결의했다


이처럼 IWW는 미국의 자본주의에 대항하기 위해 기존의 노조들로부터 소외당하고 사회에서 착취당하는 노동자들에게 호소하려 하였다. 당시 IWW의 주창자인 Eugene Debs의 주장, 즉 “선택은 자본주의와 함께 하는 AFL이냐, 사회주의와 함께 하는 IWW이냐 하는 것이다”라는 주장은 IWW가 무엇을 목표로 했는지를 잘 짐작케 한다. IWW는 Eugene Debs 이후 William Haywood가 이끌면서 자본주의를 ‘산업민주주의’로 대체하기 위한 계급투쟁을 지속적으로 펼쳤다.


그러나 이들의 접근방식은 일부 노동자들에게도 환영받지 못했다. ‘워블리Wobblies(떠돌이)’란 별명이 붙기도 했던 IWW는 “나는 일하지 않겠다I won’t work”를 의미하는 것이라는 핀잔과 함께 반대세력의 저항을 받기도 했다.


AFL이 좌익측의 비판의 여지를 남겨놓았으며, 사회주의가 지역, 직종, 민족을 초월해 노동계층에서 인기를 얻어 기존의 6개 노조가 사회주의를 지지하고 나섰고, 1900∼1912년 사이에는 사회당의 득표율이 늘어나고, 1911년에는 사회주의 후보가 73개의 시장 자리와 340개 시 1,200자리의 하위 선거직에 피선되기도 하였다.


그럼에도 결국에는 사회주의적 접근이 실패로 끝나게 된다. 특히 사회주의가 인기를 얻어갈 즈음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게 되고, 이는 노동계에도 큰 영향을 끼치게 된다. 미국이 1917년에 참전하게 되고 정부는 勞, 社, 그리고 시민대표로 구성된 위원회를 만들어 노동시간과 임금 등에 관해 협의하도록 하기도 했으며, 노동불만과 노사갈등이 있는 산업분야를 조사하도록 특별위원회(대통령의 조정위원회)를 만들기도 했다. 이 조정위원회는 노동자도 사용자처럼 조직 대표를 내세울 권리가 있으며 노동자는 회사의 자의적 조치로부터 보호돼야 한다는 원칙에 따라 일을 처리했다. 이와 같은 조치를 통해 사용자로 하여금 AFL 소속 노조를 인정토록 하는 한편, 비협조적이고 파괴적인 IWW는 제거하려 했다. 그런데다 1917년 11월 러시아에서 볼셰비키혁명이 성공하자 독일의 제국주의에 대한 염려에 더해 공산주의의 피해까지도 염려하게 된다. 그리하여 정부는 사회주의자와 워블리 탄압에 나서게 되었고, 시민들은 자경단을 조직해 사회주의 박해에 가담하였다.


이런 과정을 겪으며 미국의 사회주의 운동은 다른 나라에서처럼 성공하지 못하고 쇠퇴하게 된다. 즉 사회주의는 AFL과 같은 노조를 사회주의 활동을 위해 활용하는 데 실패했으며, 별개의 사회주의적 노동단체를 만들어 그들의 목적을 달성하는 데 성공하지도 못했다. 뿐만 아니라 사회당은 성과 인종문제에 관해서도 적극적이지 못했기 때문에 성차별과 인종차별로 인한 여성과 유색인종의 불만을 사회주의 지지로 흡입하지 못했다. 더구나 기업의 독점파괴, 공정한 임금보장, 모든 계층의 사회적 향상을 추구한다는 윌슨의 ‘신자유new freedom’는 좌파성향의 노동계층이 사회당을 떠나 민주당에 합류케 함으로써 사회당의 힘을 빼기도 했다. 이에 더해 미국의 제1차 세계대전 참전에 대한 사회당의 반대는 사회당에 대한 국민과 노동자들의 지지를 위축시켰음은 물론 사회당에 대한 정부의 탄압을 불러오기도 했다.


많은 연구자들이 지적했듯이 이와 같은 여러 요인들이 미국 내에서 사회주의의 쇠퇴를 재촉했다는 데에는 의문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여기서 한번 더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이와 같은 현상이 일어나게 된 미국 사회의 나름대로의 특수성이 있었다는 점이다. 사실 미국은 자유, 기회의 균등, 민주주의, 개인주의의 나라이다. 이런 나라에서 평등을 주장하고 나서는 사회주의가 국민들 사이에서, 특히 노동자의 권익을 위한 투쟁을 표방함에도 불구하고 노동자의 전폭적인 지지를 얻지 못한 것은 흥미로운 사실이다. 자유가 있고 민주주의가 실현되는 나라에서 이들 진보적 사상이 정치적 기반을 얻지 못한 것을 보면 그 원인이 미국 사회 자체의 특수성 때문이라고 생각되기도 한다. 이런 맥락에서 미국 사회의 사정이 좌익 정치를 유발했지만, 바로 그 속에 사회주의를 끝나게 하는 요소도 갖고 있다는 주장이 흥미롭다. 이런 의미에서 미국 사회의 특성을 검토해 볼 필요가 있다.


3. 미국 사회의 특수성과 사회주의의 유산


1) 미국 사회의 토양과 사회주의


사회주의가 미국 내에서 유산된 이유로 Daniel Bell은 사회주의가 편협한 공상적 이상향을 추구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라고도 하였지만, 미국 사회는 나름대로 그 특색이 있어 사회주의가 자라날 토양이 되지 않았다. 물론 앞에서 언급된 것처럼 정부가 힘으로 사회주의의 뿌리내림을 막은 것이 큰 원인 중의 하나이지만, 그러한 정부가 탄생, 유지됐던 데는 나름대로의 미국 사회의 특수성에서 그 원인을 찾을 수 있는 것이다. 즉 미국은 자유와 민주가 사회의 근본인 곳이다. 국민들이 사회주의를 지지했으면 피를 보는 혁명을 하지 않고도 그러한 정치인이 등장하고 그에 따라 입법이 되고 국가체제가 사회주의화 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미국 사회의 토양에는 유럽과 달리 사회주의의 활착과 성장이 안 되게 한 특수성이 있었던 것이다.


이런 터에 미국 사회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미국의 보수전통을 이해해야 한다. 사실 보수주의를 간단히 정의하기는 어려운 일이다. 1930년대의 뉴딜 정책으로 금융자본가나 시장경제주의자들이 국가경제를 관리하는 정부관리들에게 사회 주역의 자리를 내어준 후 미국 사회는 주로 진보주의liberalism에 의해 지배되어 왔다. 그러나 최근에 미국 정치, 경제의 중심이 되는 전략적 분야에 보수주의가 자리를 잡아가면서 보수주의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표면적으로 보면 보수주의는 1980년 레이건의 등장으로 비로소 관심을 끄는 것으로 보이지만, 실은 그 전부터 이어져 온 오랜 뿌리가 있다.


미국 보수성의 뿌리는 미국혁명에 영향을 준 계몽사상에서 찾을 수 있다. 미국혁명은 프랑스 계몽사상과 영국 계몽사상 모두로부터 영향을 받았으나 그 중에서도 특히 영국 계몽사상으로부터 결정적인 영향을 받았다. 그리하여 미국혁명은 공포정치나 이상향 건설을 위한 혁명세력 간의 유혈극 대신, 대륙회의를 통해 권력이 분할된 작은 정부로의 타협을 보게 되었던 것이다. 이들은 인간 삶의 개선이 어떤 지배계층이나 단체에 의해 위로부터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구성원 각자가 책임을 지고 점차적으로 이루어나가야 되는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이에 비해 프랑스혁명은 필요하다면 힘과 폭력을 써서라도 교육과 설득을 통해 새로운 인간을 만들려 하였다. 이를 위해 때로는 모든 사회 정부기구의 파괴를 서슴지 않고 공포정치와 피흘림을 서슴지 않았다. 즉 프랑스혁명은 열정이 이성을 압도하는 혁명이었다. 이러한 프랑스혁명은 미 대륙에서보다 유럽에서 정치적 또 지적 영향을 미쳤다.


미국 독립선언의 사상적 기원으로 간주되는 영국의 대표적인 계몽사상가 로크John Locke는 자연이 인간에게 동동하게 주어졌더라도 그 결실은 상이하게 되며 소유의 차등은 자연스러운 것이라고 주장했다. 즉 그가 말하는 평등은 기회의 균등을 의미하는 것이지 결과의 균등을 의미하지는 않는 것으로 이해된다. 이에 비해 역시 미국 독립혁명에 영향을 미친 루소Jean Jacques Rousseau는 인격과 소유의 평등을 주장하고 토지사유는 사회적 불평등과 그에 따르는 모든 악의 원인이라고까지 했다.


이 중에서 미국은 로크의 영향을 더 많이 받아 자유시장적 자유주의를 추구하게 되었다. 이런 관점에서 로크는 유럽의 자유방임주의와 미국의 보수주의 출현을 위한 길을 열어놓은 것이다. 이로 인해 산업화시기에 심화되어가던 빈부격차에 대해 수많은 비판적 시각이 던져지는 가운데서도, 빈곤타파는 기존의 제도의 전복을 통해서가 아니라 개인의 노력에 의해 이뤄질 수 있고 또 이뤄져야 한다는 견해가 등장할 수 있는 문화가 형성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배경에 더해 미국에서 사회주의가 성공을 못하게 만든 몇 가지 현실적 이유들이 있었는데 그들을 일별하면 다음과 같은 것들이었다. 첫째, 그 구성 민족과 인종의 다양성 때문에 노동계층이 하나의 계급으로 형성되지 못했다. 미국이라는 용광로는 건국 초부터 끓어올랐지만, 그 열과 압력은 다양한 인간특성을 하나로 녹이기에는 불충분했다.


둘째, 미국인들은 유동성이 높은 사람들이다. 지금도 그런 경향이 있지만 과거에는 더욱 심했다. 어느 한 곳에 뿌리를 내리고 살면서 서로 깊이 사귐으로써 상류층에 저항할 하류층의 결속성을 가질 기회가 적었다.


셋째, 미국은 유럽처럼 봉건 전통이 없었기 때문에 계급의식이 형성되어있지 않았다. 그러다 보니 계급투쟁이나 계급혁명을 가능케 하는 타도대상의 계급이나 타도주체의 계급이 존재하지 않았다. 또한 영국이나 독일에서 그랬던 것처럼 밉살스러운 신흥졸부bourgeois parvenu들을 타도하기 위해 때로는 노동계급과 連帶할 수 있는 반자본주의 또는 비자본주의 귀족계급도 없었다.


넷째, 산업화 과정에서 간헐적 불경기가 있기는 했지만 결국 산업화를 통해 미국경제는 번영을 누렸다. 그리고 이런 번영 위에 미국의 민주, 공화 양당이 사회개혁을 앞질러 시행해버리는 바람에 노동계층의 욕구불만이 많이 없어지게 되었다. 즉 사회주의자들의 선동과 설득에 노동계층이 호응함으로써 혁명 세력화할 사회적 압력의 김이 미리 빠져버린 상태가 됐던 것이다.


다섯째, 사회주의가 등장하기 전에 이미 미국 내에서는 남자들에게 전면적인 투표권이 주어져 있었기 때문에, 사회주의가 정치적 평등을 보장할 것이라는 호소에 매력을 느낄 소지가 없었다.


여섯째, 노동계의 지도층과 사회주의자들 사이의 불화로 인해 노동계가 사회주의 운동에 적극적으로 가담하지 않았음은 물론, 농민도 노농연대 가입을 적극적으로 하지 않았다. 물론 이에는 미국 농민 문화에 뿌리 깊이 박혀있는 개인주의와 자유사상이 큰 원인이었음을 유의할 필요가 있다.


일곱째, 미국은 경험주의 사회이다. 이들은 유럽에서 건너온 이후 대부분 비슷한 입장에서 새로운 출발을 했고, 서부 개척기간 동안에도 경제적 성취의 결과가 노력과 능력과 운의 차이에 따라 각기 다르게 나타나는 것을 체험했다. 예를 들면 1849년에 시작한 골드러시 때에도 수많은 사람들이 금 채광에 나섰으나 금덩어리도 사람에 따라 다르게 나타났다. 당시 채광된 제일 큰 금덩어리는 159파운드였던 것에 비해 어떤사람은 돌덩어리만 캐내는 것을 보며 경제적 성취의 결과가 평등하지만은 않다는 점을 그들은 체험으로 배웠다. 이것은 결과의 평등을 주장하고 나서는 사회주의자의 주장에 귀기울이지 않게 되는 요인 중의 하나가 됐다.


2) 사회 경제적 문제 비판과 현실 인정


산업화시기에 미국 사회에는 당시에 횡행하던 정경유착, 뇌물수수, 금력의 난무 등을 비판적인 시각으로 보는 지식인들이 많았다. 당시의 신흥부호를 노상강도귀족robber baron이라 부르고 당시의 갱이나 도둑을 의적 로빈 후드에 비유하기도 했다. 신흥부호들이 급속하게 많이 생겨나던 도금시대gilded age에는 정치나 경제가 부정으로 가득했다. 즉 Tammany Hall의 William Tweed에서 보듯 정치인은 경제인을 갈취하고 경제인은 정치인을 뇌물로 사는 그런 상태였다. 정계에서는 아무런 이슈도 없이 단지 뇌물과 거짓말로 점철된 개인적 비방과 후보자의 사생활 들춰내기, 인종, 종교, 민족에 관한 편견에 호소하기 등이 난무하기도 했다.


이런 것들과 함께 심화된 빈부 격차로 야기된 문제에 관해 비판적인 지식인들의 지적이 많이 있었다. 예를 들면 철도재벌을 ‘문어’로 표현한 Frank Norris, 도시 빈민굴을 묘사한 Jacob Riis, 록펠러의 축재과정을 비윤리적이라고 한 Henry Lloyd, 시카고 육가공업계의 어둠을 ‘정글’로 고발한 Upton Sinclair, 도시의 부패상을 《도시의 수치》에서 지적한 Lincoln Steffens, 그리고 토지투기로 인한 불로소득을 진보와 빈곤에서 비판한 Henry George 등이 산업화 시기의 사회 경제적 갈등을 비판적으로 지적해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간과해서는 안 될 사항은, 지식인들이 이들 벼락부자나 빈부의 격차에 대해 부정적이거나 비판적인 시각의 견해만을 전개한 것이 아니라, 곳곳에서 그것의 불가피성을 지적했다는 점이다. 몇 가지 예를 들면, 우선 미국에서는 특히 학교 교과서 등에서도 ‘가난에서 부유함으로’나 ‘기회의 땅’이 강조된다는 점이다. 물론 이러한 견해는 앞에서 언급된 로크의 사상과 연관돼 있는 것들이지만 말이다. 그 대표적인 예가 링컨 대통령이나 강철왕 카네기에 관한 얘기다.


Henry Beecher나 《다이아몬드 땅》의 저자 Russell Conwell 같은 종교지도자는 Rockefeller나 Morgan을 ‘가난에서 부유함으로’의 모델로 부각시키기도 했다. Conwell은 심지어 이렇게 주장하기도 했다. “미국 내에 가난한 사람치고 자기 자신의 결함 때문이 아니라 다른 이유로 가난한 사람은 없다는 것을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합니다”라고. 그리고 영국의 사회학자 Herbert Spencer의 사회진화론과 같이 빈부의 심화는 사회진화과정에서 일어나는 불가피한 현상이라는 주장이 널리 인용되는 예도 들 수 있다. 당시 많은 사람들이 이에 근거해 기업활동을 규제하려는 그 어떤 노력도 種의 자연적 진화를 막는 것과 같다는 주장을 하기도 했다.


매사추세츠 영국성공회 주교인 William Lawrence는 “신은 부자의 편이다”라고 하기도 했다. 당시 교회는 주로 친 기업적 태도를 취했기 때문에 IWW 워블리의 공격대상이 됐던 모양인데, 워블리의 노래 중 다음의 노랫말을 보면 그 분위기를 알 수 있다. “장발의 목사님이 매일 설교하지요, 무엇이 옳고 그르다고 말예요. 그러나 우린 뭘 먹고 사느냐 물으면 목사님은 달콤한 말로 대답합니다. 아무렴. 먹을 수 있고 말고. 저 영광의 하늘 나라에서 일하고 기도하세요. 그러면 저 세상에 가서 그림의 떡을 먹을 수 있을 거예요.” 이 노랫말은 교회가 가난한 자의 편이 아님을 잘 드러내고 있다.


이 외에 컬럼비아대학의 총장인 Nicholas Butler의 “사회적 정치적 병은 사람에 의해서보다 자연에 의해 더 잘 고쳐진다”라든가, 당시 예일대 사회학자였던 William Sumner의 “생존을 위한 투쟁이란 자연의 법칙으로서 重力처럼 언제나 존재하기 때문에 없앨 수 없는 것이다”라는 주장 등이 부의 찬양이나 빈부의 격차를 피할 수 없는 현상으로 합리화하는 견해들이다.


이에 맞장구를 쳐 카네기는 이런 말을 한다. “피할 수가 없다. 이 법칙은 모든 분야에서 적자생존을 보장하기 때문에 어떤 개인에게는 괴로움이 되더라도 전체를 위해서는 최선의 길이다”라고. 그뿐 아니다. J. P. Morgan은 “신은 가장 돈을 잘 다루는 기독교인에게 돈을 준다”라고 주장하는가 하면, 한 교육자는 학교 졸업식에서 “여러분들은 돈을 많이 벌어야 합니다. 부자가 되는 게 여러분의 의무입니다. 이 중에 성공하는 이가 있는가 하면, 실패하는 사람도 있게 마련입니다”라고 하기도 한다.


노골적인 부자 옹호는 록펠러 소유 탄광에서 광부들이 파업을 하고 있던 때, “언론은 왜 광부의 권리만 지지하고, 개인권과 재산권에 대해서는 왜 주장하지 않는가?”라고 한 Paul Elmer More의 주장에서 찾아 볼 수 있다. 사법부에서도 판결이 노동자보다 사업가에게 유리하게 매겨진다. 즉 셔만법Sherman Act은 파업이 업무방해행위라고 판결하는 등 대기업 규제를 위해 쓰여져야 할 법이 파업 같은 노동활동의 규제를 위해 쓰이기도 하고, 심지어 의회가 누진세를 부과하려하자 그것은 위헌행위라고 판결하기도 했다.


이처럼 미국 산업화 시기에는 당시의 사회 경제적 갈등을 놓고 매우 비판적인 견해가 등장하기도 했지만, 빈부격차의 심화에 대해서는 그것을 하나의 불가피한 현상으로 보는 주장이 공개적으로 많이 등장하기도 했다. 이는 우리 나라의 지식인들이 주로 淸貧을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칭송해 왔던 것과는 대조적이다. 사실 富를 죄스럽지 않게 하는 분위기라야 사람들이 부를 이루기 위해 노력하고, 그런 노력이 전체를 부유하게 만든다. 가난만을 칭송하고 부를 죄스럽게 만들면 부유한 나라가 되기 어렵다. 그리고 거의 모든 사람이 본능적이라고 할 만큼 부를 좋아하는 터에 부를 칭송하는 것이 오히려 우리 자신들을 정직하게 만든다.


그렇다고 해서 부정부패 등을 신랄하게 비판함으로써 미국의 발전에 공헌한 여러 지식인들의 역할을 경시해서는 안 된다. 본고는 단지 부에 대한 비판에 맞서 전개됐던 부의 칭송과, 빈부격차 발생의 현실을 인정해야 한다는 주장에도 무조건 백안시 할 것만이 아니라 귀담아 들어야 할 점이 있음을 지적하고 있을 뿐이다.


4. 결론


미국은 지금으로부터 약 1세기 전에 급속한 산업화를 이루었다. 이 산업화는 사회적으로, 경제적으로, 더 나아가 정치적으로도 혼돈과 갈등을 초래했다. 물론 이들 혼돈과 갈등에는 정치의 부패, 정경유착, 뇌물수수, 법관의 매수 등의 문제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러나 가장 큰 문제의 하나는 빈부격차의 심화로 인한 빈부갈등, 구체적으로 말하면 없는 자인 노동자와 있는 자인 사용자 사이의 갈등이었다. 이런 판국에 노동자들은 자신들의 권익옹호를 위해 여러 형태의 노조를 결성하고 여러 수준의 노사분규와 투쟁을 했다. 더구나 당시는 칼 마르크스의 선도 아래 제1차 인터내셔널이 있기도 했고, 사회주의자들의 활동이 전세계적으로 활발해지는 시기이기도 했다.


미국은 자유, 평등, 민주주의가 중요한 사회의 가치기준이 되고 있는 나라이기 때문에 어쩌면 사회주의가 성공할 수 있는 곳으로 보이기도 했다. 그러나 바로 그 사회의 특수성 때문에 미국 내에서의 사회주의 시도는 유산되고, 오히려 20세기 후반에 와서는 반공산주의의 보루가 되어 20세기 말에 다시 사회주의의 퇴조 내지 종말을 보게 하기도 했다. 그리고 21세기의 문턱에 와서는 경제정책상 보수주의적 접근이 늘어나 미국 경제가 호황을 누리고 있기도 하다. 이런 터에 미국의 산업화 과정에 있었던 갈등을 검토하고, 많은 노력에도 불구하고 사회주의의 유산을 초래한 미국 사회의 특수성을 일별함은 의미 있는 일이다.


사실 미국 문화의 뿌리가 된 미국혁명이 프랑스의 계몽사상보다 영국의 계몽사상에서 더 큰 영향을 받았다는 점, 미국사회의 특수성이 사회주의가 뿌리 내릴 토양이 안 되었다는 점 등이 오늘의 자본주의 국가 미국의 기초가 됐다. 오늘날의 미국을 보면 산업화 시기에 미국인들이 겪었던 사회적 갈등과 고통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심각했다. 그런 역경을 딛고 일어 선 오늘의 미국을 보며 그들의 성공이 풍부한 물질적 자연자원 때문만이 아니라 그들의 정신적 역량에 크게 기인했음은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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