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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주만기습으로 인한 미국의 2차대전 참전에 대한 고찰

공부장/American Study

by 지지에이치 2005. 4. 6. 22:30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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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주만 기습이 미국의 세계 2차 대전참전에 미친 영향력에 대한 고찰




이상혁     






목   차




서론



세계 2차 대전 발발과 일본의 팽창주의





본론


Ⅰ. 미국의 국내외 정세와 고립주의



Ⅱ. 진주만 기습 전야의 미국의 소홀



Ⅲ. 진주만 기습이 가져온 경과(피해와 정신적 충격)






결론


미국의 참전과 전략 그리고 2차 대전에 미친 영향력




서론


제1차 세계대전 후 자본주의 세계는 전반적 위기단계에 돌입하였다. 더욱이 자본주의 제국의 발전의 불균등이 두드러졌고, 1929~33년의 세계공황은 이와 같은 불균등에 근거하는 국제대립을 일거에 첨예화시켰다. 즉 자본주의 열강의 블록화와 폐쇄 경제적인 경향은, 자본주의국가로서 기초가 약한 독일, 이탈리아, 일본 등에게 심각한 영향을 주었다.

 일본은 국내정책의 정돈상태를 타개하기 위하여 1931년 9월 중국 동북에서 침략행동을 개시, 33년 ࡐ만주국ࡑ을 성립시켜, 이 지역에 자본주의 발전의 기반을 얻으려고 하였다. 33년 3월 국제연맹이 만주국을 부인하자 일본은 곧 연맹을 탈퇴하였다.

  41년 12월 일본은 태평양전쟁을 일으켰다. 37년 7월 이래로 일본은 중일전쟁의 늪 속으로 깊이 빠져들었고, 영, 미와의 관계도 악화되었다. 40년 5월이래 독일이 네덜란드, 프랑스를 항복시키고 영국 본토 상륙의 기미가 보이자, 일본은 40년 9월에 독일, 이탈리아와의 3국 동맹을 체결하였고 ࡐ호기남진(好機南進)ࡑ의 방침으로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및 네덜란드령 인도차이나를 침공하였다. 이에 대하여 미국은 수출제한, 미, 영 결속, 장제스[蔣介石]정권 원조강화로 대응하였다. 41년 6월 독, 소전(戰)이 시작되자, 일본에서는 재차 ࡐ북진론ࡑ이 대두되어 대소전의 준비가 진행(관동군 특별연습)되지만, 정부로서는 ࡐ남진ࡑ 방침을 결정하고 7월에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남부에 진주하였다. 이것은 미, 일 관계를 결정적으로 악화시켰다. 미국은 즉각 재미 일본 자산을 동결하였고 석유의 대일 금수를 실시하였다. 이 조치는 일본 군부의 대미 개전론을 자극하였고, 10월에 주전파인 도조[東條] 내각1)이 들어섰다.

1941년 12월 미국과 일본간의 전면 전쟁이 발발 되기 전 미군과 일본군은 항공전력확장에 몰두해 왔으며 일본항공부대는 1930년대 초반부터 중국과 만주일대에서 벌어진 중국, 일본, 소련간의 분쟁 중 치열한 공중전을 통해 항공전력을 강화하고 전투력을 향상시키는 좋은 계기로 삼아왔다. 일본군이 태평양전쟁 초기에 일시적으로 미군을 압도하고 전승을 구가할 수 있었던 것은 이와 같은 오랜 세월에 걸친 항공전력의 축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세계정복의 유혹은 압도적인 것이었다. 1941년 8월 일본의 정치적인 주도권을 장악하고 있던 일단의 군국주의자들은 동남아시아와 태평양의 지도를 펴놓고 대동아공영권의 야심을 펼치고 있었다. 그들은 그들 앞에 놓여진 장래의 피의 대가에 대해서는 믿지 않으려 했다.

 유럽에 있어서의 독일의 정복은 프랑스와 네덜란드의 식민지제국을 표류하게 했으며 이들이 공격을 받아도 본국으로부터 지원가능성은 전혀 없었다. 영국은 말레이제국과 함께 싸우고 있었으나 일본이 군사적으로 말레이제국을 침범해도 이를 방해할 힘이 없는 것으로 보였다.

 그러나 중국본토에 있어서의 일본의 오랜 전쟁은 교착상태에 빠져있었다. 소련육군과 공군의 전력은 1939년에 몽고전투에서 과시됐으며 일본군의 최고사령부는 소련은 일본이 다루기에는 너무 강하고 큰 상대임을 간판하고 있었다.

 1941년 겨울, 소련육군이 모스크바를 향해 후퇴하고 있을 때에 동쪽과 남쪽에는 공격하기 쉬운 표적이 있었다. 중국에서의 전쟁은 일본육군의 전쟁이었다. 만약 일본의 지휘부가 서부태평양의 광대한 지역에서 전쟁을 하기로 찬성한다면 그것은 일본해군의 최고의 시간이 될 것이며 해군항공력은 대단히 중요한 요소였다.

 그러나 태평양 건너편에는 아직도 중립을 지키고 있는 미군이 있었는데 그의 육군은 작았지만 해군은 세계에서 규모가 가장 컸다. 미국의 산업은 세계에서 가장 큰 육군을 만들어낼 힘이 있었으며 1941년의 일본함대를 하잘 것 없는 것으로 만들 수 있는 군함과 항공기의 생산능력을 갖고 있었다. 30년 이상 동안 일본제국 해군은 계획의 근거를 미국과의 비교에 두고 있었다. 1920년대와 1930년대에 걸쳐 일본은 그의 라이벌에 대항해 서부태평양지역에서의 방어를 위주로 훈련해왔다.

 1940년 중 미국과 관계는 급속히 악화되어갔다. 1940년 7월 미국은 야심적인 새 해군의 건설계획을 발표했다. 그 해 9월에 일본이 프랑스령 인도지나의 북쪽을 점령함에 따라 미국은 중요한 석유공급을 포함하는 통상금지조치를 가했다.

 그러나 일본 수뇌부에 있어 미래 해군세력의 계산은 간단한 것이었으며 태평양지역에서 기회의 문을 닫혀지고 있었다. 1937년에 시작된 전투함 건조계획이 1941년 거의 끝나감에 따라 그 해 말까지 일본해군의 미국에 대한 함정비율은 7대 10이 되게 돼 있었다. 그러나 미국의 함정건조계획이 진행됨에 따라 이 비율은 1943년 5대 10 그리고 1944년에 3대 10으로 벌어지게 돼 있었다.

 만약 일본이 행동을 취할려면 지금 해야할 때였다. 일본의 야욕은 방비가 거의 없는 동남아의 유럽식민지를 소유하는 것만으로는 불충분했다. 서부태평양지역에서의 방해를 제거할 수 있는 결정적인 공격을 가해 미국을 패퇴시켜야만 했다.

 그리하여 일본은 12월 8일  진주만을 기습 공격하게 된 것이다.

 나는 이 논문에서 미국이 2차 대전에 전면적으로 참전하게된 계기가 되었던 일본의 진주만 기습사건이 주는 의미에 대해서 고찰하고자 한다.

  진주만 기습은 그 동안 전쟁에 대해서 고립주의를 취하고 있던 미국에게 충격을 던져주었고 더 이상 세계무대에 소극적인 입장을 취할 수 없게 말들었다. 미국내의 고립주의자들에게도 더 이상 그들이 주장해야할 명분이 사라지게 되었고, 마침내 미국은 세계대전에 참전하게 된 것이다.

 미국의 2차 대전 참전은 치밀한 계획 하에 이루어 졌다. 일본에 대한 무조건 적인 공격이 아니라 향후 전세에 대한 정밀한 계획 하에 미국은 독일을 공격하게 된 것이다.

 미국의 그런 의도에 대해서 고찰하고자 한다.




Ⅰ. 미국의 국내외 정세와 고립주의

 1930년대의 미국의 대외적인 측면을 보면 루즈벨트 대통령이 뉴딜2)에 의한 국내 정치에 노력을 기울이고 있을 때 유럽에서는 나찌스 독일이나 파시스트 이탈리아의 움직임이 급속도로 활발해지고 있었다. 독일의 재 군비 선언이나, 라인란트 진주, 이탈리아의 이디오피아 침략, 그리고 스페인 내란에 대한 히틀러와 뭇솔리니의 공동 간섭하는 식으로 거기에 대하여 유럽 민주주의 국가들이 지극히 연약한 태도로 응했다는 것이다. 이에 대서양 건너편에 있는 루즈벨트는 그러한 유럽의 움직임에 대해서 어떤 반응을 나타내고 있었던가. 이 점을 살필 때 미리 알아두어야 할 것은 당시 미국의 국내에서는 고립주의의 세력이 종전에 없었던 만큼 강화되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고립주의라는 밖으로부터 서반구에 들어오는 개입을 거부하며 그와 동시에 미국 측에서도 서반구의 이외의 다른 지역에 대해서는 되도록 정치적 관련을 피하려고 하는 입장이다. 이 입장은 19세기초에 5대 대통령 먼로3)에 의해서 이른바 먼로 독트린4)이 발표된 후로 뿌리깊은 전통을 형성해 온 것이었다. 하지만 1930년대만큼 국민의 광범위한 지지를 받고 또한 그 내용이 엄격했던 시대는 없었을 것이다. 해양의 자유나 통상에 관한 전통적인 권리를 다소 희생하는 한이 있더라도 국외의 분쟁에는 결코 말려들고 싶지 않다는 것이 당시 미국의 대부분 국민들을 지배하고 있던 기분이었다.

 루즈벨트 행정부의 첫 몇 년간은 후버의 구체적 경제 협정들에 대한 희망이 사라진 것보다 더 두드러진 특징을 나타내었다. 루즈벨트 행정부도 역시 조약과 군비축소를 통한 세계 평화에 대한 여하한 희망에 대해서도 종지부를 찍었다. 1차 세계대전 후 윌슨의 이상주의가 후퇴한 이후로 미합중국은 다른 국가들과 구속적인 관계에 얽매이지 않고, 모범과 격려를 통하여 세계 정세에 영향을 미치려고 하였다. 루즈벨트는 이와 같은 정책을 계속 시도하였고, 여러 경우에 있어서 이 정책을 확장하려고까지 하였다. 그러나 국내의 반대와 국제적 쇠퇴가 혼합되어 그의 희망은 좌절되었다.

 1920년대의 국제적 타협들이 1930년대의 세계에는 더 이상 적합하지 않다는 사실은 루즈벨트가 대통령직에 들어선 지 몇 달 안되어 명백해졌다. 이제 새로운 행정부는 세계의 군비축소에 대한 운동을 고무시키려고 하였다. 제네바에서의 무기 통제 회의는 아무런 결과도 없이 1932년 이래로 계속 열려왔다. 1933년 5월에 루즈벨트는 미국의 새로운 제안을 제출함으로써 이 회담이 실행을 옮겨질 수 있도록 고무시키기 시작했다. 실질적인 군비축소의 일환으로서 미합중국은 미래의 침략을 단념시키기 위해 제한된 방법으로 여러 국가 들고 서로 협력할 것에 동의하였다. 특히 미국은 모든 나라와 자유롭게 통상을 하기 위한 중립권을 주장하려고 하기보다는 오히려 침략자에 부과되는 어떠한 통상 금지도 지키려고 하였다. 사실 이것은 이미 제1차 세계대전 초기에 지키려고 시도하였던 것이었다. 히틀러를 포함하여 여러 유럽 지도자들은 이 제안에 열렬히 좋은 반응을 나타내었다. 그러나 프랑스는 효과적으로 모든 협상에 교묘히 발뺌을 하면서 군비축소에 대한 모든 노력에 반대하였다.

 이와 동시에 무기 통제 협상들은 다른 원인들로부터 더욱 더 맹렬한 타격을 받고 동요하고 있었다. 아돌프 히틀러는 1933년 10월에 그 회담으로부터 독일을 탈퇴시켰다. 이태리는 비록1935년까지 이 연맹에 회원 자격으로 남아 있었지만 독일과 거의 동시에 회담을 포기하였다. 제네바 회담이 실패라는 것은 그 당시 명백했다. 2년 후에는 일본이 런던 해군 회담으로부터 철수하였다. 이 회담은 1921년의 워싱톤 회담에서 협상된 해군 장비의 제한을 지속시키기 위한 협정을 작성하려고 하고 있었다. 세계 군비축소를 위한 운동은 붕괴되고 말았다.

 1920년대의 허약한 국제적 균형의 붕괴는 미합중국에 대해 선택권을 부여하였다. 명백하게 점점 악화되고 있는 세계 정세 속에서 미국인들은 이러한 상황을 회복하기 위한 능동적인 노력 속에서 자신들의 입장을 취할 수가 있었고 자신들을 고립시킴으로써 대처할 수 있었다. 거의 주저함이 없이 미국인들은 후자를 선택하였다. 이 고립주의에 대한 지지는 많은 방면으로부터 나왔다. 지난 윌슨 행정부의 국제주의자들도 국제연맹에 대한 환상을 점점 깨우쳤으며, 아시아에서의 일본 침략을 저지할 수 도 없는 연맹의 무능력에 환멸을 느꼈다. 이제 그들은 국제주의는 실패했다고 주장하기 시작했다. 또 다른 미국인들은 강력한 대기업가들이 미합중국을 유혹하여 1차 세계대전에 참전시켰다는 논쟁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콜로라도의 상원의원인 제랄드 나이가 의장을 맡은 상원위원회가 제출한 한 보고서는 전시중에 많은 기업가들의 엄청난 부정 이득과 속 들여다보이는 탈세를 폭로하였고, 또한 은행가들이 자신들의 해외 대부금을 보호하기 위하여 윌슨에게 압력을 가하였다는 사실을 제시하였다. 더욱이 이와 같은 조사 결과들로 인하여 국민들의 눈에 비춰진 국제주의의 세력은 더욱 신임을 잃었으며, 그와 같은 요인들로 인하여 미국이 전쟁으로 다시 끄려 들어가지 않도록 보장하는 노력에 더욱 박차를 가하였다.

 루즈벨트 자신도 고립주의자들의 의혹에 대해 일부 공감을 하였고 Nye조사단5)의 조사결과에 깊은 감명을 받았다고 주장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세계 평화를 유지시키는 데 있어서 적당한 미국의 역할에 대한 희망을 버리지 않았다. 1935년에 그는 미합중국을 세계 법정의 일원으로 만들기 위한 조약을 상원에 제출했다. 이 조약은 어떠한 중요한 상황에 있어서도 미국의 적극적인 책임감을 증가시키지 않으면서 국제주의에 대한 미국의 상징적인 공약을 확대시키는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립주의자들의 반대로 결국 이 조약은 파기되었다. 이것은 대통령에 대해선 결정적인 정치적 타격이었으며 그는 다시 고립주의적 추세에 도전하려고 하지 않았다.

 이러한 추세는 날이 갈수록 더욱 강해졌다. 1935년 여름 내내 뭇솔리니의 이태리가 아프리카에서의 식민지 소유권을 확장시키기 위한 노력으로서 이디오피아를 침공하려고 준비하고 있다는 사실이 세상에 점점 더 명백하게 드러났다. 전 유럽의 전쟁이 뒤이어 발발할 것을 두려워한 미국의 입법자들은 미합중국이 이 분쟁에 말려들지 못하도록 하기 위하여 입법적인 보호조항을 구상하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결과가 1935년의 중립법6)을 가져왔던 것이다. 1935년의 법안 그리고 1936년의 중립법, 그리고 1937년7)에도 뒤따라 나온 이러한 법안들은 많은 미국인들이 이제 믿고 있는 미국을 제1차 세계대전으로 몰아넣었던 사건들의 재발을 막기 위해 구상된 것이다. 1935년 법은 어떠한 군사적 분쟁에서도 희생자와 침략자 둘 다에 대해서 무기수출입금지에 관한 위임사항을 수립하였고, 미국 시민들이 위험을 무릅쓴다면 서로 교전 중인 국가들의 선박으로 여행해도 좋다는 사실을 대통령이 통고할 수 있도록 권한을 부여하였다. 이와 같이 고립주의자들은, 중립권의 보호가 다시는 미국인의 전쟁 개입에 어떤 구실이 될 수가 없다고 확신하였다. 1936년에 더욱 더 불확실해지고 있는 세계정세에 따라 의회는 더 한층 엄중한 법안을 통과시켰다. 무기 통상금지의 필요를 계속 옹호함과 더불어 이 새로운 중립법은 소위 현금 자금선박 수송 정책을 수립하였다. 이것은 교전국들이 현금을 지불하고 그들 스스로 구입품들을 선적함으로써만이 미국으로부터 비군사적인 상품들을 구입할 수가 있다는 것이었다. 비판자들은 이 법안들이 1차 세계대전으로부터 미국을 지키기 위한 법률과도 마찬가지라고 비웃었다. 그러나 고립주의자들은 단념하지 않았다.

 군사적 중립에 대한 미국의 자세는 1935년 10월 마침내 뭇솔리니가 오래 기다려 왔던 이디오피아에 대한 공격을 개시했을 때 재 강화되었다. 만일 누군가가 아직까지도 집단 보장체제가 그러한 침략을 막을 수 있다고 믿고 있다 하더라도 이 침공에 효과적으로 대처하는데 실패한 국제연맹의 비참한 모습은 그러한 사람들의 환상을 일소시켰다. 뭇솔리니는 손쉽게 이디오피아를 패배시켰고 연맹이 항의하자 그는 간단히 이 조조 기체로부터 탈퇴하고 히틀러의 독일과 함께 하나의 동맹을 결성하였다. 이디오피아 분쟁 직후 실시된 미국 여론 투표 결과는 이 위기가 고립주의적 감정을 재 강화 시켰었다는 사실을 시사하였다. 고립주의적 감정은 1936년과 1937년의 스페인 내전에 대한 반응으로 다시 한번 그 강한 면모를 과시했다. 프란시스 프랑코 장군의 팔랑해 당원들은 1936년 7월에 온건한 입헌군주정인 기존 정부에 대해 반란을 일으켰다. 히틀러와 무솔리니는 선전과 무기와 공급품 등을 가지고 물심양면으로 프랑코를 지원하였다. 미국은 어느 쪽에도 지원하지 않을 것을 영국과 프랑스와 함께 협정하였다. 이 세나라 모두는 팔랑해 당원들에 대해서보다도 왕당원들에게 더욱 동정적이었기 때문에 이 협정의 결과는 그 어떠한 다른 방법이라 하더라도 반프랑코 세력에 결정적인 원조를 해 줄 수 는 없는 것이었다. 단지 소련만은 적극적으로 왕당원들을 지원하였는데 이 정책은 진퇴양난에 빠진 스페인 정부에게 어떤 돌파구를 마련해 줄려는 것이라기 보다는 미국 국제주의자들의 눈에 비친 러시아의 이미지를 개선하려는 것이었다. 스페인에서의 파시스트 도전을 저지시키기 위해선 미국이 개입해야만 한다고 믿고 있는 사람들의 괴로워하는 탄원에도 불구하고 루즈벨트는 단호히 중립을 지지하고 있었다. 스페인 내란이 시작된 지 한달 후에 공공연하게 그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우리가 전쟁으로부터 완전히 우리 자신들을 고립시키려고 하는 경우를 제외한다면 우리는 고립주의자들이 아니다.

 자신의 공개적인 성명에도 불구하고 프랭클린 루즈벨트는 1935년과 1936년의 사건들을 점증하는 공포심을 가지고 관찰하고 있었다. 만약에 주요한 국제분쟁이 발발한다면 미국은 고립주의자들이 어떤 행동을 취하더라도 개입하지 않은 채로 남아 있을 수는 없다는 사실을 그는 알고 있었다. 이제 그와 같은 분쟁에 대한 가능성이 점점 더 표면화됨에 따라, 그는 세계 사태 속에서 미국의 역할을 증가시킬 방법을 고려하기 시작하였다. 천천히 그리고 조심스럽게 루즈벨트는 국가 외교정책에 대한 고립주의자들의 단결에 도전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일시적으로 보기에 그것은 실질적으로 가망이 없는 동기처럼 보였고 미국은 마침내 전쟁의 발발을 막기에는 역부족인 것으로 나타났다.

 고립주의자들이 유럽에서의 쇠퇴해 가는 사태로부터 미국을 보호하기 위해 분주한 가운데 이와 똑같이 불온한 각본이 아시아에서 전개되고 있었다. 아시아에 있어서 일본 세력의 성장은 국제 안정에 직접적인 위협이 되고 있었다. 중국에 대한 일본의 침략적인 의도는 1931년 만주를 침공한 이래로 명백해져 왔다. 1937년 여름 동경에서는 더욱 더 참혹한 공격을 개시하여 막대한 군사력으로 중국의 북부 5개성을 공격하게 했다. 이러한 행동은 미국을 중대한 딜레마로 빠뜨렸다. 중국과 태평양에 대한 일본의 지배는 거기에서의 미국의 통상과 투자를 위협했으며 고무와 그 밖의 주요한 원료에 대한 미국인들의 거래를 위태롭게 하였다. 또한 이것은 이디오피아 침공이나 스페인 내란보다도 훨씬 더 직접적으로 세계 평화에 도전했다. 이제 루즈벨트는 미합중국이 일본의 침략에 대해 아무런 언급도 없이, 혹은 아무런 응징도 가하지 않은 채 내버려 둘 수는 없다고 확신하였다. 그러므로 1937년 10월에 대통령은 태평양에서의 견제정책에 대한 국민들의 지지를 불러일으키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그는 전쟁의 확산을 막기 위해선 국제사회로부터 침략자들을 고립시켜야 한다고 선언했다.

 1936년 3월 히틀러는 1차 대전 이후로 프랑스가 실제적으로 통제하였던 한 지역을 재무장시키기 위해 그 당시 강력해진 독일 군을 라인란트로 진주시켰다. 1938년 3월에 독일 군은 오스트리아로 진군했으며 히틀러는 그의 모국인 오스트리아와 그가 성장했던 곳인 독일과의 합병을 선언했다. 여기에 대해 미국과 유럽에서는 반대한다는 불평밖에는 별다른 것이 없었다. 그러나 오스트리아 침공은 또 다른 위기를 가져왔다. 그 이유는 히틀러는 서부의 체코의 영토를 그 당시 이내 획득하였으며 이 지역은 그가 필요한 것으로 확신했던 생활권을 독일에 제공하기 위해 합병을 꿈꾸었던 곳이었다. 미국을 포함하여 대부분 서구의 국가들은 또 다른 전쟁의 가망성에 소스라쳐 놀랐으며 평화적으로 해결하기 위해 어떠한 대가도 기꺼이 지불하려고 하였다. 프랑스와 영국도 독일의 요구를 받아들이기로 동의하였다. 그러나 4월에는 폴란드에 대한 위협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이때 영국과 프랑스 양국은 단호한 결의를 하였다. 그들은 재빨리 폴란드가 만약 침공을 받을 경우엔 폴란드 정부를 원조해 줄 것이라고 보장하였다. 그리고 그들은 러시아와 상호 방위 협정을 작성하려는 시도로서 스탈린 정권과 뒤늦게 교섭하기조차 하였다. 그러나 스탈린은 이미 서유럽으로부터 보호를 기대할 수 없다는 결정을 내렸고 그는 결국 뮌헨회담에 참석하기 위한 초대조차도 받지 못했다. 따라서 그는 당장 두 전선의 위험으로부터 독일인들을 자유롭게 해주는 히틀러와의 불가침조약을 1939년 8월에 체결하였다. 몇 달 동안 히틀러는 폴란드를 위협해서 독일 통치하에 예속시키려고 계속 노력하였다. 이것이 실패하자 그는 독일이 공격을 받았다고 주장할 수 있도록 해 주는 국경에서의 한 사건을 꾸며냈다. 1939년 9월 1일에 그는 폴란드에 전면 침공을 개시했다. 자신들의 서약에 충실했던 영국과 프랑스는 이틀 후에 독일에 대한 선전포고를 하였다. 그래서 2차 대전은 발발하였다.

  미국의 고립주의가 광범위한 지지를 받은 이유로서는 전쟁에 대한 본능적인 공포나, 군수산업에 대한 일반 민중의 반감 같은 여러 가지 이유를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러한 세론(世論)이 법률의 형태로 결정되어 대통령의 입장을 속박하게 된 사실이다. 의회는 1935년 8월 이디오피아의 위기가 절박한 순간을 배경으로 해서 중립법을 통과시킨 것이다. 이 중립법에 따르면 세계 어느 곳에서 전쟁 상태가 발생하는 경우 미국의 대통령은 침략국과 그 희생 국을 구별하는 권한을 대통령에게 인정하지 않는 점에서는 35년의 중립법과 변함이 없었다. 루즈벨트 대통령 자신은 원래 고립주의자가 아니었다. 그는 제1차대전이 끝난 후인 1920년 민주당으로부터 부통령 후보로 출마했을 때에도 윌슨 대통령의 이념에 따라 미국도 베르사유 조약을 비준하여 국제연맹에 가입하는 게 옳다고 주장을 내세우고 있었다. 그후 국제연맹에 가입하자는 주장은 일단 철회했지만 미국이 국제 정치에서 어떤 적극적 역할을 해야 한다는 그의 신념자체는 변하지 않고 있었다. 그러나 실제로 대통령에 취임한 그는 고립주의를 원하는 세론(世論)에 의해서 커다란 제약을 받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루즈벨트 자신도 현재의 상황에서는 외교 문제 때문에 고립주의 세력과 마찰을 일으켜 뉴딜의 진행을 위험에 빠뜨려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있었다. 당면한 노력의 목표는 뉴딜에 의해서 국내의 공황을 극복하는 데 있으며 외교 활동은 그 다음이라는 것이 당시의 실상이었던 것이다. 이와 같은 미국의 태도는 1937-8년의 시기에 이르러서도 실질적으로는 그다지 변하지 않았다. 유럽의 정세는 시시각각으로 악화되어가고 있었으므로, 루즈벨트는 대통령도 사태가 매우 심각하다는 인식은 충분히 하고 있었지만 유럽나라들 상호간의 외교적 교섭으로 해결되기를 바라고 있었다. 다시 말하면 영국이나 프랑스의 유화 정책에 희망을 걸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평화적인 해결을 위해서라면 미국이 중재 역할을 맡아도 좋다는 정도의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실제로 루즈벨트는 1938년 9월 수데덴의 위기가 긴박해졌을 때 히틀러에 메시지를 보내어 어디든지 유럽의 중립적인 도시에서 관계국의 수뇌 회의를 개최할 것을 제안한 일이 있었다. 하지만 그 메시지에서도 미국의 입장을 제약하고 말았다. 이처럼 1938년경까지의 루즈벨트 외교는 설사 그것이 본의는 아니었다 하더라도 유럽에 대한 구체적 정책에 나타난 한에서는 어디까지나 소극적이었다.

 그러나 대전이 발발하고 고립주의에서 중립적이 노선으로 변경하였다고 해도 미국의 상황은 더욱 전쟁의 수렁에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1941년 6월 22일에 독일이 소련에 대한 공격을 시작함으로써 영국․미국의 입장은 점차 유리해졌고, 7월 7일에는 미 해군의 아이슬 랜드 파견이 발표되었다. 9월에 미 해군에게 독일 군함에 대한 공격명령이 내려짐으로써 실질적으로 선전포고 없는 전쟁이 이루어졌다. 끝으로 11월 13일의 중립법안 개정으로 상선의 무장과 교전구역의 출입도 허가됨으로써 중립법의 마지막 금지규정도 폐지되어 미국은 교전당사국이 되어 버렸다. 물론 참전이 공식화된 것은 12월 8일의 일본의 진주만 기습공격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1941년 8월 14일에 루즈벨트와 처칠은 대서양헌장8)을 발표함으로써 미국․영국간에 전쟁에 대한 공동정책을 분명히 하였으며, 이 선언을 통한 민족자결주의, 나찌스 독일의 완전한 괴멸 그리고 항구적인 일반적 안전보장제도의 확립 등은 국제적인 관심을 끌기에 충분하였다. 이렇게 대서양의 문제와 유럽대륙에서의 전쟁에 미국이 간접적으로 개입하게 되면서 미국의 다음 문제는 태평양에 관한 워싱턴체제의 붕괴에 따르는 중국대륙에서의 전쟁문제였으며 그 문제의 주역은 일본이었다.

 워싱턴체제가 붕괴됨에 따라 일본의 중국침략은 심각해졌고, 중국문제를 둘러싼 미국의 정책은 반일․친 중국적인 성향으로 노골화되었다. 그러면서도 미국은 중국문제를 둘러싼 일본과의 갈등 속에서, 비슷한 이해관계를 가진 유럽의 영국이나 러시아와의 협력에는 망설이는 입장이었다. 이것은 아시아와 중국의 문제를 엄격히 태평양국의 문제로 보는 것이 미국의 입장이었다. 독일․소련 조약이 일본에게는 환영할 만한 것이 아니었으며, 일본과 소련의 관계는 상호 시의와 감시의 대상이었다. 1940년도의 유럽전쟁은 일본으로 하여금 남방진출의 가능성을 높여 주었다. 독일이 네덜란드를 점령하기 이전에 일본은 화란동인도회사에 경제적인 양보를 강요하였고, 프랑스의 붕괴로 일본의 프랑스령 인도지나반도에의 진출기회는 더욱 커졌다. 미국의 경고와 반대에도 불구하고 일본은 극동에서는 프랑스의 비시정권에게 최후 통첩을 발하고 이를 통해 양보를 받아냄으로써 9월에는 인도지나를 점령하였다.

 미국의 일본에 대한 철강수출 금지조치를 비우호적인 것으로 규정하고 일본은 삼국동맹의 당사국이 되었다. 대동아 공영권이라 불리는 새로운 태평양의 질서를 건설하기 위한 일본의 의도는1941년 4월의 일․소불가침 협정으로 그 실현 가능성이 높아 보였고, 6월 22일에 다시 독일이 소련을 공격하기 시작함으로써 일본의 남방정책은 더욱 활기를 띨 수 있었다. 일본의 남방정책이란 태평양에의 진출을 의미하며 이에 미국과의 대치는 불가피하게 되었다. 워싱턴체제가 붕괴됨에 따라 중국문제를 둘러싸고 미국․일본관계의 긴장 도를 낮추고 태평양에서의 전쟁을 회피하기 위한 미국․일본간의 교섭은 1940년 3월부터 비롯되었다. 이 때 미국의 태도는 세계평화의 유지와 태평양문제의 해결을 위해서는 일본과 협력을 추구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일본 내에서는 미국과의 친선을 주장하는 세력이 있긴 하였으나 독일․이탈리아와의 삼국동맹으로써 새로운 세계질서를 형성하려는 세력이 강력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대미교섭은 삼국동맹의 테두리 속에서 미국의 유럽전쟁에의 참여를 방지하기 위한 위장전술의 성격도 띄었다. 1941년 4월 9일 미국과 일본 양국민이 작성한 7개 조목의 양해사안은 유럽전쟁에 대한 입장, 중․일전쟁에 관한 양국정부의 태도, 태평양에서의 정치적 안정을 위한 조치에 관한 내용으로 중요한 것이었다. 첫째 유럽전쟁에 대한 양국정부의 입장을 결정하는 가장 큰 요소는 삼국동맹에 대한 양국의 해석과 이해관계의 문제였다. 둘째 사안은 중․일 관계에 관해서 중국의 독립 및 미국의 만주정권 승인 등의 조건들을 미국 대통령이 승인하고 일본정부가 보장할 때, 미국 대통령은 이에 기초해서 장개석 정권과 일본과의 평화를 권고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조건에 의해 장개석 정권이 미국 대통령의 권고에 응할 때에는 일본은 즉시 평화교섭을 개시해야 된다는 것이었다. 셋째 태평양 문제에 있어서 미․일 양국은 태평양의 평화유지를 위해서 우선 타방을 위협할 해군 및 항공병력의 배치를 금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비공식시안은 후일의 미․일 교섭의 기초가 되었으며, 상당히 우호적이었다. 우선 유럽전쟁에 대해서는 각국의 입장을 명백히 했고, 중국으로부터의 일본군의 철병은 무조건적인 것이 아니고 중․일 협정에 의하기로 하였다. 또한 장․왕 정권의 통합이 인정되었고 무병합․무배상조항 등 비교적 온건한 내용이었다.

 이러한 제의와 대안의 제시 등으로 미․일교섭이 본격화되자 일본과의 동맹국인 독일․이탈리아는 이를 적극적으로 방해하고 나섰으며, 독일 주일대사등은 일본의 태도를 힐문하였고, 또한 6월 22일에는 독일이 소련과 개전함으로서 일본의 대미교섭에 혼란을 주었다, 그리고 일본은 국내 정치과정에서의 친독세력을 견제하기 위하여 7월 2일 어전의회를 개최하고 일본의 대소개전의 위기를 막는 데 진력하였으나, 그 결과는 일본의 북방진출 대신 남방진출로 나타나 육군이 주장하는 프랑스령 인도지나반도의 진주를 인정하게 되었으며, 7월 26일에는 일본군의 프랑스령 인도지나반도 진주를 발표하기에 이르렀다. 이를 전후해, 미국의 자산동결령이 나왔고, 또한 석유의 대일수출이 금지됨으로써 일본과 미국의 관계는 극도로 악화되었다. 위기 상태로 들어선 양국관계의 타협을 모색키 위하여 1941년 8월 28일 근위 일본수상9)은 루즈벨트와의 회견을 제의하였으나, 미국은 6월 21일의 제의와 기본원칙에 대한 일본의 동의를 선결조건으로 제시함으로써 근위․루즈벨트회담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후 미․일 교섭이 다시 시작되고 반년이 지난 후 원칙적인 대립문제에 있어서, 첫째로 일본․독일․이탈리아의 삼국동맹조약과 미․일관계의 문제, 둘째 중국에서의 경제적 기회균등주의 문제, 그리고 셋째로는 진중 및 주불인의 일본군 철병문제가 제기되었다. 첫째 문제와 둘째 문제에 대해서는 비교적 타협의 가능성이 있었으나 세 번째의 일본군의 철병문제는 중국에서 일본이 군사적․경제적 근거지를 유지하기 위한 정책으로 추진하였기 때문에, 동조를 우두머리로 한 육군의 주장이 완강하여 타협가능성은 거의 없었다.

 근위수상이 사임하고 동조내각이 들어섬으로써 일본의 대외정책 방향은 명백해졌다. 그러나 동조의 수상 취임에는 두 개의 조건부적인 단서가 있었다. 하나는 9월 6일의 어전회의에서 결정한 대미교섭을 10월 중순에서 더 연장하여 교섭을 계속한다는 것으로, 이 시한은 11월 15일까지로 연장되었다. 둘째는 육․해군간의 알력을 해소시키기 위해서 내천해상을 도전해상으로 교체한다는 것이었다. 이로써 대미교섭의 시한이 연장되었으나 가장 어려운 문제는 중국으로부터의 일본군 철병이었고 이에 대한 동조수상을 비롯한 군부의 태도는 완강하여 타협의 실마리를 풀 수가 없었다. 오직 일본 국내에서의 교섭무용론을 억제시키기 위하여 교섭을 지속시키고 있는 것에 불과 하였다. 협상자체를 정체상태로 몰아넣고 있는 철병문제에 대하여 일본은 중국과 프랑스령 인도지나반도에서 철병할 의사가 전혀 없는 상태였고, 오직 협상은 양국의 국내정치관계에서만 그 뜻을 지녔다. 새로 들어선 동조내각은 주전론이 지배하였으며 그에 따른 전쟁준비내각이기도 하였다. 동조내각은 개전일을 결정하였고, 일본측 개전의 시한은 협상결과에 대한 기대 속에 연장되었다. 한편 미국은 최후노력의 일환으로 10개 항목에 달하는 제안을 하였다. 이는 중국에 있어서 제외국의 특권적 지위의 일반적 폐기를 주장하면서 일본에 유리한 과도협정을 체결하는 대신 일본군이 철병할 것을 그 내용으로 하고 있다. 그러나 이 제안은 일본에게 받아들여질 수 없는 것이었다.


Ⅱ. 진주만 기습 전야의 미국의 소홀


 미국은 어이없게도 기습을 당했다. 일본의 교란작전과 미국의 무사안일주의 가 낳은 불행이라고 말할 수 있다.

 미국의 정보국은 일본군의 공격 임박설에 대한 사전 정보들은 많았으나, 그 아무도 이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1941년 1월 주일대사 조셉 그류는 일본군의 진주만 공격 계획 정보를 입수했다.

 공격개시 수시간 전에 진주만 외곽에서 한 대의 잠수함이 발견되고 다른 한 대는 원인 불명인 채 침몰되었으며, 오아우 북쪽 해안 레이다 기지에서는 거대한 비행물체가 포착되었다. 많은 관리들은 일본군의 공격임박설을 알고 있었으나, 그 대상이 일본으로부터 5,000 마일 떨어진 진주만이 아닌 필리핀이라고 생각했다.

 한편 일본은 치밀한 계획 하에 진주만 기습을 계획했다.

 1941년 초 일본군 통합 함대 사령관인 야마모토 제독은 진주만 공격의 타당성 조사를 비밀리에 지시했다. 미국에서 하버드대학을 다닌 그로서는 어느 누구보다도 미국의 산업능력, 자원의 풍부성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장기전에서는 승리가 거의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다. 그는 또 진주만을 기습공격하여 미군의 함대의 기능을 상실 시키고 나서, 그 공백기에 동남아로 진출하여 강력한 방어막을 구축했다. 그 다음에 두 대양에서 1, 2년의 소모전을 벌인 후에 미국, 영국 정부와 협상을 통한 영토 분할에서 우위를 점령하려는 작전계획을 구상했다. 이러한 상황을 종합해 보면 진주만 공격은 방어적인 개념이 강한 기습공격이라 볼 수 있다.

 그는 비밀리에 일을 추진하면서 한편으로는 문제해결을 위한 외교적인 협상을 계속하였다. 1942년 루즈벨트 대통령은 또 다른 평화안을 제안했다. 즉 미국은 일본이 만약 점령지로부터 군대를 철수하고 중국 정부와 평화회담을 재개한다면 일본과의 정상적인 통상관계를 재개할 수 있다고 발표했다. 이러한 미국의 제안이 일본 정부에 전달되기도 전에 일본군의 전함과 수송선이 동남아시아의 이동 소식으로 들려왔다.

11월 6일 6대의 일본 항모들은 본토 항구를 빠져 나와 진주만으로 향하는 항해를 시작했는데, 미국 상선에 의한 포착을 피하기 위해 항로를 안개가 짙게 깔리는 얼류선 열도와 미드웨이 사이로 잡았다.

 12월 2일 본국 정부로부터 최종 작전명인 "climb Mt. Nitaka"가 하달되었고, 동시에 다른 함대는 동남아 방향으로 향진하고 있었다. 이러한 비밀군사 작전을 수행하면서도 일본 정부는 겉치레에 불과한 협상을 계속했는데, 12월 7일 워싱턴 시간으로 정각 1시에 미국 정부에 전달하라는 지시를 받았다. 그러나 해독상의 문제로 인해 통지사항은 정해진 시간에 전달되지 못했다.

 미국의 정보국에서는 이러한 교신 내용을 사전에 도청하여 해독했으며, 이것이 의미하는 것을 무엇인지 파악했지만 정확한 시간을 알지는 못했다. 단지 예방책으로 샌프란시스코, 파나마운하, 하와이 그리고 필리핀에 있는 미군기지에 경계 명령만을 하달했다. 하지만 그 시간에 이미 일본기들은 1,264일의 시간이 소모된 태평양전쟁의 서곡을 위해 진주만을 향해 날아가고 있었다.

 미국은 속수무책으로 엄청난 피해를 입게된다.



Ⅲ.진주만 기습이 가져온 경과(피해와 정신적 충격)



 오전 6시 30분에 항공기 첫 편대가 일본 항공모함으로부터 발진하기 시작했으며 30분 동안 183대가 출격했다. 이 중에는 1800파운드의 철갑폭탄을 장비한 수평폭격기 B5N '케이트' 49대가 포함돼 있는데, 이것은 두꺼운 장갑갑판을 가진 전함을 공격하기 위한 것이었다. 또 비행장을 폭격하기 위해 250킬로그램의 폭탄을 탑재한 아이치 D3A1 급강하폭격기 55대 그리고 폭격기를 엄호하고 지상에 대한 기총사격을 가할 A6M '제로전투기' 43대의 항공기가 포함돼 있었다. 이와 같은 다수의 호위전투기를 배치한 것은 중국에서의 경험에 의한 것이었는데 일본폭격기는 현대식 전투기의 공격에 아주 취약한 것이 입증됐기 때문이다.

 공격편대군은 항공모함 상공에 집결해 편대를 짜고 남쪽으로 향했다. 비행고도는 엷은 구름이 깔린 바로 위인 6750피트이었으며 목표지역까지의 소요비행시간은 1시간 50분이었다. 

 진주만의 해군기지는 일요일 아침의 안개 속에 잠겨있었다. 함정승조원들은 제3경계태세를 유지하고 있었으며 전투함정의 대공포 중 4분의 1은 요원을 배치하고 있었다. 진주만의 언덕 위에 있는 미육군의 레이다 조작사는 접근해오는 항공기군을 접촉하고 보고하였으나 이 항공기는 그 날 아침 캘리포니아로부터 도착하게 돼 있는 B-17 편대로 오인되었다. 오전 7시 55분 태평양기뢰함대소속의 기뢰부설함에 승함해 진주만 입구에 있던 기뢰함대사령관은 항공기가 폭탄을 투하하는 것을 보았다.  폭탄이 떨어짐과 거의 동시에 태평양지역사령부에 경보가 울렸다. 수분 후에 놀란 태평양함대 사령관 허스밴드 킴멜 제독은 일본군의 공격보고를 받았다. 포드 섬에서는 그의 부장인 벨링거 소장이 '진주만 공습중, 이것은 연습이 아님.'이라는 방송을 하고 있었다. 많은 함정승조원들은 일요일 외출로 육상에 나가 있었다.

 첫 번째 공격은 오아후의 비행장들을 강타했다. 힉캄과 휠러비행장에 폭탄이 떨어져 밀집시켜 놓은 육군항공대의 항공기를 파괴시켰다. 7시 57분 어뢰공격기의 제1파가 전함 정박구역의 함정을 공격하기 위해 해상을 초저공으로 누비며 쇄도했다. 일본의 제로전투기들은 미군전투기들이 공격기들을 요격하기 위해 출격하는 기미가 보이지 않자 지상표적에 대한 기총사격을 임의대로 실시했다. 오전 8시 5분 특수철갑폭탄을 탑재한 수평폭격기들의 폭탄이 전함에 명중하기 시작했다.

 공격은 약 6분간 계속됐으며 진주만 해군기지는 폭발과 하늘로 치솟는 기름연기 구름으로 쌓였다. 전함 정박지에 있던 함정들은 참화를 입었다. 전함 '애리조나'는 침몰했으며 '테네시'와 '메릴랜드'는 불길에 쌓였다. '오클라호마'는 12발의 폭탄을 맞아 대파됐으며 '버지니아'는 9발, '캘리포니아'는 3발의 직격탄을 맞았다. 항진을 할 수 있었던 유일한 전함인 '네바다'는 폭탄을 맞고 해안에 좌초했다. 노후된 '유타'는 전복되었으며 순양함 '헤레나'는 어뢰 5발을 맞았다. 수천명이 익사, 소사 또는 침몰하는 배와 함께 수장됐다.    제2파의 편대군은 오전 8시 54분에 시마사키 중령이 이끄는 167대의 공격부대에 의해 실시됐다. 제2파의 편대군은 공격기를 엄호할 35대의 제로전투기, 비행장을 공격할 54대의 수평폭격기 그리고 전투함정을 재공격할 72대의 급강하폭격기로 편성돼 있었다.

 미군의 공중에서의 저항은 미미해서 제1차 공격부대의 편대장인 후지다 중령은 3시간 동안에 한 대의 미군기와도 만나지 않았다. 미군의 항공전력은 지상에서 대부분 파괴됐다. 미해병항공기지인 이와 비행장에 있는 49대의 F4F 와일드 캣과 SBD 다운트레스는 제로전투기에 의해 지상에서 파괴되었다. 해병대는 다운트레스기를 끌어다 놓고 후방석의 기총으로 공격하는 일본기에 필사적으로 사격을 가했다. 일본군의 공격이 한창인 때에 항공모함 '엔터프라이즈'에서 날아온 SBD 다운트레스가 이와 비행장 상공에 도착해 공격을 목격했다. SBD 편대장 H.L. 양 중령은 전투기의 공격과 대공포사격을 피해 포드비행장에 무사히 착륙했다.

 북쪽에 떨어져 있어 공격을 받지 않은 작은 육군항공대 비행장인 할레이와에서 P-40 전투기 4대로 구성된 2개 편대와 P-36 1개 편대가 8시 15분부터 오전 10시 사이에 출격해 적기 7대를 격추시켰다. 빌로기지는 9시 50분까지 힉캄기지에서는 11시 27분까지 한 대의 전투기도 출격하지 못했다. 오아후섬에 있는 231대의 육군항공대의 항공기중 97대가 파괴되고 88대가 심하게 파손됐다. 그날 늦은 아침에 항공모함 엔터프라이즈로부터 날아온 수대의 F4F 와일드 캣은 지상포화에 의해 격추됐으며 4대의 SBD 기도 마찬가지였다. 그날 오후에 와일드 캣과 SBD 기들은 일본함대를 찾아 나섰다.

 일본은 그들의 큰 승리와 작은 피해에 기뻐 날뛰었다. 그들의 공격의 정확성은 많은 훈련을 통해 예상했던 바와 일치했다. 항공기에서 투하된 어뢰의 반 이상이 명중했으며 급강하폭격기에서 투하된 폭탄의 50퍼센트와 수평폭격기의 폭탄 25퍼센트가 목표에 명중했다. 나구모의 공격기동함대는 전투기 9대, 급강하폭격기 15대 및 뇌격기 5대를 상실했으며 74대가 파손됐으나 항공모함으로 모두 귀환했다. 하와이로부터 40마일 가까이 까지 접근했던 항공모함에 착함 하던 일본군 항공기는 해상상태가 나빠져 15도까지 롤링하는 악기상 속에서 50대가 착함 중 부서졌다. 일본군의 조종사 및 승무원의 손실은 55명이었다.

 미 해군은 4척의 전함이 침몰되고 3척이 대파됐으며 1척이 반파되었다. 그리고 2척의 경순양함이 파손됐으며 구축함 3척이 대파됐다. 보조함은 3척이 침몰되거나 대파되었다. 해군과 해병대는 3077명이 사망(실종자 960명 포함, 대부분은 전복된 '애리조나' 함에 갇혀 익사)했으며 876명이 부상당했다. 육군 및 육군항공대에서 226명이 죽고 396명이 부상했다.

 제1파 및 2파의 공격편대군이 거의 무사히 귀환하자 기함인 아카기 함상에서는 다음에는 무엇을 할 것이냐의 불확실한 한때가 흘러갔다. 히류함상에 타고 있는 공격적인 야마구치제독은 제3차 공격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러나 나구모사령관과 제1항공함대사령관인 구사카제독은 처음부터 2차 공격까지만 계획하고 있었다. 오아후 섬에는 수리시설과 유류저장시설 등 아직도 손대지 않은 많은 주요 표적이 남아있었으며 방어력은 거의 궤멸된 상태에 있었다. 마침내 기함 아카기의 지휘소에서는 철수하기로 결정했다.

 일본의 연합함대사령부에서는 진주만 공격성공의 보고를 듣고 환성이 터져나왔다. 누구나 야마모토가 미 태평양함대를 완전히 섬멸하기 위해 그 날 밤이나 그 다음날에 새로운 공격을 나구모에게 명령할 것으로 기대했다.

 항상 신중한 야마모토는 결정을 나구모에게 일임했는데 역시 신중한 나구모는 아마도 미해군의 5척의 항공모함이 하와이로 돌아올 것을 우려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일본의 정찰기와 정보기관은 한 척의 항공모함의 위치도 탐지하지를 못했다. 기함 아카기의 마스트에 철수신호기가 게양된 것은 오후 1시 30분인데 이것은 폭탄을 탑재한 공격기가 아카기의 갑판을 발진한지 7시간만의 일이었다.

 진주만에 대한 공격은 약 3시간동안 진행됐다. 항공전투의 측면에서 볼 때 진주만 공격작전은 새로운 무기와 기술을 구사해 놀라운 성공을 거둔 공대지전투의 걸작품이었다. 방어군 측의 항공전력은 5개월 전에 바바로사작전의 개전초기에 독일공군이 러시아에서 수행했던 것처럼 지상에서 궤멸됐다. 장거리항속능력을 갖추고 중무장한 일본군의 제로전투기는 앞에 있는 모든 것을 쓸어버리는 놀라운 비행기처럼 보였다.

 그러나 전략적인 측면에서 볼 때 일본함대의 공격은 미 해군의 태평양해역전력에게는 엄청난 타격이 되었으나 그것은 큰 실책이었다. 루즈벨트 대통령이 '파렴치한 날'이라고 불렀듯이 일본의 공격은 사전경고나 선전포고 없이 수행됨으로써 미국의 고립주의자들을 복수심에 불타게 만들었다. 일본군의 공격은 미국세력에 손상을 입혔으나 그것을 파괴하지는 못했다. 실제로 6척의 전함은 구조물이 파괴되어 정박지역에서 침몰했으나 앞으로의 전투에서 해군전력의 결정적인 역할을 맡게 될 항공모함은 손상되지 않은 채로 건재했다. 일본해군은 남방의 자원지역을 계속 정복해 나갔으며 작전 Z는 그 서곡에 불과했다. 미국의 해군항공세력은 서부 및 중부태평양에서 일본군의 진출을 방해할 능력이 있었고 한편 손상되지 않고 남은 진주만의 수리시설과 유류 저장시설은 재건함대를 육성하고 지원하는데 기여했다.





결론


 진주만 공격이 있은 지 10시간 뒤에 일본 함정들은 다시 필리핀의 마닐라 미군 공군기지를 공격하여 큰 피해를 주었다. 사흘 뒤에 일본은 미국의 영토인 괌(Guam)을 점령하였다. 뒤이어 일본은 미국령 웨이크아일런드와 영국령 홍콩도 점령하였다. 1942년 2월에서 5월에 이르는 사이에 일본은 계속 공격하여, 영국의 군사기지인 싱가포르, 네덜란드령 동인도제도, 영국령 미얀마, 그리고 미국령 필리핀을 점령하였다. 맥아더 장군이 물러난 필리핀에서는 1만 2천명의 미군이 일본군에 항복하였다.

 진주만 기습이 일어나기 전 해에 이미 미국과 영국은 전쟁의 일차적 목표를 나치 독일의 타도로 결정한 바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국은 당장 일본과의 전쟁에 관심을 두지 않으면 안되었다. 우선 미국은 떨어진 국민의 사기를 높이기 위해 제임스 두리틀(James H. Doolittle)장군이 이끄는 폭격기들을 항공모함으로부터 발진하여 도쿄를 폭격하는 모험을 감행하였다.

 그러면서 미국은 일본군을 격퇴할 두 가지 장기전략을 마련하였다. 첫 번째는 맥아더(Douglas MacArthur)장군의 지휘로 오스트레일리아로부터 뉴기니아를 거쳐 필리핀으로 진격한 다음, 궁극적으로는 일본 본토를 공격한다는 전략이었다. 두 번째는 체스터 니미츠(Chester Nimitz)제독의 지휘로 하와이로부터 태평양 중부의 섬들을 탈환하고, 궁극적으로는 일본 본토를 공격한다는 전략이었다.

 첫 번째 전략은 1942년 5월에 산호해 해전(Battle of Coral Sea)10)에서 미국의 항공모함들이 승리함으로써 성공을 거두기 시작하였다. 두 번째 전략은 1942년 6월에 미드웨이(Midway)해전11)으로 성공을 거두기 시작하였다.

 미드웨이 해전 직전에 미국은 일본군의 암호를 해독하여 대대적인 공격이 있을 것임을 간파하였다. 그 때문에 미국은 작전 수역에 미리 항공기와 함정을 집결시킬 수 있었다. 나흘 동안의 치열한 전투에서 미국은 1척의 항공모함을 희생으로 하여 4척의 일본 항공모함을 격침시키는 승리를 거두었다. 그에 따라 미국은 중태평양을 장악할 수 있었다.

 그리고 남태평양에서는 치열한 전투 끝에 솔로몬 군도의 과달카날(Guadalcanal)섬을 점령하였다. 그리하여 1943년 장악할 수 있게 되었다.

 독자적으로 전략을 세웠던 태평양 전선과는 달리, 유럽 전선에서 미국은 동맹국인 영국, 드골의 “자유 프랑스군”과 연합하여 나치 독일과 싸우고 소련과도 협력하지 않으면 안되었다.1943년 봄에 육군 참모총장 조오지 마샬(George Marshall)장군은 연합군이 도비해협을 건너 나치 독일군이 점령하고 있는 프랑스를 침공할 계획을 세웠다. 그리고 그 책임자로서 잘 알려지지 않은 드와이트 아이젠하워(Dwight D. Eisenhower)장군을 임명하였다.

 그러나 독일과의 전면전쟁으로 기진맥진한 소련의 스탈린은 연합군의 프랑스 상륙작전 시기를 가능한 한 앞당길 것을 요구하였다. 이와는 달리 영국의 윈스톤 처칠 총리는 좀 더 기다리려고 하였다. 그는 프랑스 영토를 공격하기 전에 나치 제국(Nazi Empire)의 외각 지대인 북아프리카나 남유럽을 먼저 공격하기를 희망하였다.

 1942년 봄에 에르빈 롬멜 장군이 이끄는 독일군은 이집트 서부 지역의 엘알라메인(El Alamein)으로 진격하여, 영국의 영향권에 있던 수에즈 운하와 중동 지역 전체를 위협하였다. 그리고 동부 전선에서 소련군과 전투를 벌이고 있던 독일군은 남쪽의 코카서스 지방을 향해 진격하고 있었다.

 1942년 5월에 소련 외무장관 몰로토로프는 미국을 방문하여 유럽 대륙에 미국군과 영국군으로 구성된 제2전선(second-front)12)을 즉각 구축하도록 요구하였다. 그렇지 않으면 소련은 나치 독일에게 패망할 것이라고 경고하였다.

 그러나 한 달 후에 미국으로 달려온 처칠은 북아프리카 침공을 먼저 시행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루즈벨트는 처칠의 의견에 따랐다. 왜냐하면 당시 미국은 유럽 대륙을 침공할 만한 대규모의 병력을 가지고 있지 못했기 때문이다.

 마침내 1942년 11월에 미국군과 영국군은 북아프리카에 상륙하였다. 미국군은 500척의 전함과 350척의 수송선을 동원하였다. 상륙 지점은 나치 독일에 협력하는 비시 프랑스의 영토인 알제리의 알지에와 모로코의 카사브랑카였다. 비시(Vichy) 프랑스군은 미국군에 대해 저항하였다. 게다가 롬멜이 이끄는 독일군은 노련한 영국군보다는 전투경험이 없는 미국군에게 집중 공격을 퍼부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국 아이젠하워와 조오지 패튼(George S.Patton) 장군이 이끄는 미국군은 버나드 몬거메리(Bernard Montgomery) 장군이 이끄는 영국군과 함께 1943년 5월에 독일군을 아프리카로부터 완전히 몰아내는 데 성공하였다.

 영국의 처칠은 다시 미국의 루즈벨트에게 이탈리아 남쪽 섬인 시실리에 침공할 것을 제안하였다. 그렇게 되면 많은 독일군 병력을 이탈리아와 발칸반도에 묶어 둘 수 있게 될 것이라고 처칠은 주장하였다. 1943년 1월에 열린 모로코의 카사블랑카(Casablanca)회의13)에서 처칠의 의견이 채택되었다. 그리하여 미국군과 영국군은 1943년 7월에 시실리 섬에 상륙하였다.

 예상했던 대로 히틀러는 이탈리아를 방어하기 위해 독일군을 투입하였다. 독일군과 연합군 사이에 치열한 전투가 계속되었다. 그러나 연합군은 1944년 6월에 로마를 함락하였고, 그 결과 무솔리니 정권이 무너졌다.

 독일 항복이후 유럽질서와 태평양전쟁을 마무리 짓기 위한 최종적인 연합국 수뇌의 회담은 1945년 7월 17일부터 8월 2일까지 베를린 남부교외의 포츠담에서 열렸다. 이 회담에서는 미국의 트루먼 대통령, 영국의 애틀리 수상, 소련의 스탈린이 참석하였다. 여기에서는 유럽전쟁을 마무리 짓기 위한 합의사항들을 구체화 시켰다. 유럽문제 해결을 위한 모임에서 제외되었던 중국은 다시 미국, 영국과 회동하여 일본과의 전쟁을 끝맺기 위한 협의에 들어갔고, 그 결과가 7월 26일에 나온 미․영․중 삼국의 포츠담회담이었다. 이 선언에서 연합국은 일본에게 무조건항복을 권고하였다. 또한 계속해서 카이로선언의 영토에 관한 조항은 이행될 것이며, 일본의 주권은 본주․북해도․구주 및 4국과 연합국이 정하는 작은 섬들에 국한시킬 것과, 일본군의 완전무장해제를 요구하였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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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도쿄[東京] 출생. 육군대학을 졸업한 후 관동군 헌병사령관, 관동군 참모장, 육군차관 등을 역임하였다. 1940년 제2차 고노에[近衛] 내각의 육군대신이 되어 중국침략 확대를 주장하고, 1941년 제3차 고노에 내각을 개전론(開戰論)으로 무너뜨렸다. 같은 해 10월 후계내각을 조각(組閣)하여 육군․내무대신도 겸임하고, 12월 8일 하와이의 새벽 진주만(眞珠灣)에 있는 미국함대기지를 기습 공격함으로써 제2차 세계대전을 일으켰다.

 개전(開戰) 후 독재를 강화하여, 1943년 문부(文部)․상공․군수(軍需) 장관도 겸임하고, 한국에서는 징병제와 학도병 지원제를 실시하였으며, 1944년에는 참모총장까지 겸임하였다. 그러나 전황이 전면적 파국으로 빠져들자, 1944년 7월 총사퇴하였다. 종전(終戰) 후 자살을 기도하였으나 미수에 그치고, A급 전쟁범죄자로 극동국제군사재판에 회부되어 1948년 교수형에 처해졌다.


2) 뉴딜 제법안의 작성에 대통령 측근의 경제 ․법률 분야에서 진보적인 학자와 전문가 그룹, 즉 브레인 트러스트(brain trust)가 기용된 사실은 유명하다. 이렇게 하여 33년에 입법화된 주요 정책은 다음과 같다. ① 긴급은행법(緊急銀行法)을 제정하여 재기 가능한 은행에는 대폭적인 대부(貸付)를 해줌으로써 금융공황으로부터 은행을 구출하여 은행업무의 정상화를 도모하였다. ② 금본위제(金本位制)를 폐지하고 관리통화법(管理通貨法)을 도입하여 통화에 대한 정부의 규제력을 강화하였다. ③ 농업조정법(農業調整法)을 제정하여 농업의 구제를 도모하였다. 이것은 주요 농산물의 생산제한으로 과잉생산을 없애고 농산물가격의 하락을 방지하여 균형가격(均衡價格)을 회복하려는 의도에서였다. 또, 농민에게 자금원조를 해줌으로써 농업구제에 대한 시도를 하였다. ④ 전국 산업부흥법(産業復興法)을 제정하였다. 이것은 각 산업부문마다 공정경쟁규약(公正競爭規約)을 작성하게 하여 지나친 경쟁을 억제시켰으며, 생산제한 ․가격협정을 인정하고 적정한 이윤을 확보시키는 한편 노동자의 단결권 ․단체교섭권을 인정하는 동시에 최저임금과 최고노동시간의 규정을 약속하여 노동자에 대한 안정된 고용과 임금을 확보하게 하려는 데에 그 뜻이 있었다. ⑤ 테네시강(江) 유역 개발공사(開發公社)를 설립하였다. 이것은 이 지역의 발전(發電)과 치수관개용(治水灌漑用)의 다목적댐을 건설하여 종합적인 지역개발을 실행하려는 것으로서, 정부에 의한 전력(電力)생산사업이라는 점에서도 획기적인 정책이었다. ⑥ 자원보존봉사단(資源保存奉仕團) ․연방임시구제국(聯邦臨時救濟局)을 설립하였다. 이것은 정부자금에 의한 실업자와 궁핍자(窮乏者)의 구제책으로서 설립한 것으로, 지방자치단체의 구제활동을 연방정부가 원조하려는 시도이기도 하였다.


3) 버지니아주(州) 웨스트모어랜드 출생. 윌리엄앤드메리대학교 재학 중 미국독립혁명전쟁에 참전하였고, 버지니아 주의회 의원, 연합의회 의원, 상원의원, 프랑스 주재 공사, 버지니아 주지사를 거쳐서, 1803년 루이지애나 구입 교섭을 위해 프랑스에 특파, 이어 런던에 건너가 대통령 T.제퍼슨의 중립정책유지를 위해 노력하였다. 1811년 다시 버지니아 주지사를 역임한 후, J.매디슨 행정부 국무장관이 된 후 1816년과 1820년 두 차례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4) 러시아의 태평양 진출과 독립 직후의 라틴아메리카 여러 나라에 대한 유럽으로부터의 간섭에 대처하기 위하여, 영국이 공동선언을 제의한 데 대하여 미국이 독자적으로 선언을 하여야 한다고 주장한 국무장관 J.Q.애덤스의 의견이 받아들여져서 발표되었다고 한다. 먼로주의의 근원은 대통령 G.워싱턴 이래의 고립주의(孤立主義)에 의한 것이지만 그것을 더욱 명확하게 하여, ① 미국의 유럽에 대한 불간섭의 원칙, ② 유럽의 미국 대륙에 대한 불간섭의 원칙, ③ 유럽 제국에 의한 식민지건설 배격의 원칙 등 3개 원칙을 분명히 하였다.


5) 위원장인 상원의원 G.나이의 이름을 따서 붙인 명칭이다. 제1차 세계대전 중에 군수산업가들이 '죽음의 상인'이라는 비난을 받으면서 얼마나 많은 이윤을 획득하였는지를 밝히는 동시에 군수산업(방위산업)의 국유화 또는 특별과세를 권고한 것이었는데, 입법화에는 성공을 거두지 못하였다.

 그러나 그해 빈슨트란멜법에 영향을 주었고 국방상의 계약에서 막대한 이익을 얻는 행위를 배제하는 첫걸음이 되었다.


6) 35년에 전쟁상태가 존재한다는 것을 대통령이 선언하였을 경우에는 미국 국민이 교전국에 대하여 군수품을 매각 ․수송하는 일을 비합법화할 것을 정하였다. 이듬해에는 교전국에 대한 차관 제공을 금지하는 조항을 추가


7) 37년에는 전쟁뿐 아니라 내란에도 적용되는 것으로 하였다. 같은 해 5월에는 이들 조항을 더욱더 강화한 중립법이 제정


8) 제2차 세계대전 후의 세계 국민복지와 평화 등에 관한 양국 정책의 공통원칙을 정한 것으로 내용은 다음과 같다. ① 양국은 영토의 확대를 원하지 않는다. ② 관계 주민의 자유의사에 의하지 아니하는 영토 변경을 인정하지 않는다. ③ 주민이 정체(政體)를 선택하는 권리를 존중하며, 강탈된 주권과 자치(自治)가 회복될 것을 희망한다. ④ 세계의 통상 및 자원에 대한 기회균등을 도모한다. ⑤ 노동조건의 개선과 경제적 진보 및 사회보장을 확보하기 위하여 경제 분야에서 국제협력을 도모한다. ⑥ 나치스의 폭정을 파괴한 다음 모든 인류가 공포와 결핍으로부터 해방되어 생명의 보전이 보장되는 평화를 확립한다. ⑦ 공해(公海)의 자유항행을 확보한다. ⑧ 침략의 위협을 주는 나라의 무장을 해제하고, 항구적이며 전반적인 안전보장제도를 확립하며, 군비부담의 경감을 조장한다.


9) 정당정치를 존중하였으나 군부가 일으킨 중일전쟁에 끌려들어가고 말았으며, 몇 차례나 중국과의 화평(和平)을 시도하였으나 군부의 반대에 부딪쳐 전쟁이 확대일로를 걷게 되자 수상직을 사임하였다. 1940년 7월 다시 내각을 조직하였으나 정당은 해산되고, 대정익찬회(大政翼贊會)가 결성되어 전시체제는 한층 강화되었다.

 1941년 10월 대미(對美) 강경론자인 외상 마쓰오카 요스케[松岡洋右]를 경질하고 제3차 내각을 조직하였으나, 희망을 버리지 않았던 대미교섭은 군부의 독주(獨走)로 말미암아 더욱 절망적인 상황에 이르자 수상직을 사임하였다.



10) 1942년 5월 이곳에서 미국과 일본의 항공모함 함대 사이에 최초의 본격적 해 ․공(海空) 격전이 벌어졌다.


11) 일본군은 야마모토[山本] 해군대장이 지휘하는 전함 11척, 항공모함 8척, 순양함 18척 등 연합함대 주력과 나구모[南雲] 중장 지휘하의 기동부대를 합친 350척의 대병력을 동원하여 미드웨이섬의 미군기지 공격과 미해군 기동부대를 유인 ․섬멸하기 위한 작전을 펼쳤다. 일본으로서는 이 작전을 입안중이던 4월에 J.H.둘리틀의 폭격기대에 의하여 도쿄[東京]가 첫 공습을 받자 이 작전에 제해수역(制海水域)의 확대까지도 기대하고 있었다.

 그러나 색적(索敵)을 게을리한 것과 암호가 미국측에 해독된 탓으로 대기중이던 미국의 급강하 폭격기대의 급습을 받고 나구모 함대는 주력 항공모함 4척과 병력 3,500명, 항공기 300대를 상실하는 참패를 당하였으며, 제공권 상실로 작전을 중지하는 수밖에 없었다.

 태평양전쟁 개전 이래 태평양 ․인도양에서 우위를 지켜 온 일본의 해군 기동부대는 이 해전의 패배 이후 전국의 주도권을 미군측에 내주게 되어 전쟁 수행상 중대한 전환점이 되었다.


12) 1941년 6월 독일군의 전격전에 직면한 소련군이, 강력한 독일군의 세력을 분산시키기 위하여 미국과 영국에 대해서 유럽에 제2전선을 펴줄 것을 요구한 바 있다. 미국과 영국은 다른 지역에서의 작전 때문에 그것을 즉시 실행하지 못하였으나 결과적으로 44년 6월에 노르망디에 상륙함으로써 유럽에 제2전선을 설치하게 되고, 동부 전선의 소련군과 협동하여 독일을 협공한 바 있다.


13) 1943년의 연합국측 공동작전을 토의하여 구체적으로는 시칠리아섬 상륙을 결정하였다. 회담에서 루스벨트는 처음으로 이 전쟁을 추축국(樞軸國)의 무조건 항복으로써 종결시킨다는 방침을 명백히 하였다. 이 시기에 북아프리카에 본토의 비시 정권으로부터 독립해서 수립되어 있던 프랑스정권에는 드골과 H.H.지로의 양 지도자가 대립상태에 있어서 이 회담에 양 지도자를 참석시켜 조정을 시도하였으나 충분한 해결은 보지 못하였다.

 

 

 

 

☞ 출처: 원광대학교 사학과(http://mahan.wonkwang.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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