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방 후 미국과 우리나라와의 간추린 사건들>
일본이 패망하자 미국과 소련은 1945년 8월 25일 한국의 38선 분단점령을 발표하고, 이어 맥아더 사령부가 미군에 의한 남한분할점령책을 발표함에 따라 9월 8일 J.R.하지 중장 휘하의 미군이 인천에 상륙함으로써 향후 3년 간의 미군에 의한 남한의 군정이 시작되었다. 같은 해 9월 11일 하지 중장의 미군 시정방침 발표와 아널드 소장의 미군정장관 취임에 이어, 19일 ‘재조선(在朝鮮) 미육군사령부 군정청’이라는 공식명칭으로 발족하여 남한의 통치에 들어갔다.
미군정청은 통치 초기부터 한국인의 정신적 지주이던 임시정부의 부인(否認), 신탁통치안의 고수, 미온적인 대공정책(對共政策) 등으로 우익정치 지도자들과 불편한 관계를 맺게 되었으며, 특히 우익진영의 지도자이던 이승만과 하지는 정치적 견해차로 반목이 극심하였다. 이에 따라 하지는 김규식(金奎植)의 중간우파(中間右派)와 여운형(呂運亨)에 의한 좌·우 합작으로 난국에 처한 한국의 정치적 국면을 타개하려 하였으나 이러한 시도는 실패하고 말았다. 결국 미국은 1947년경부터 시작된 미·소의 냉전에 따라 모스크바협정 노선을 버리고 한반도문제를 유엔에 넘기기로 정책을 전환하여 1947년 10월 유엔에 ‘한국독립촉진결의안’을 제출하게 되었다.
이에 따라 이승만의 복안대로 남한 단독정부가 수립되고 미군정은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 1948년 8월 15일 0시를 기하여 폐지되었다. 대한민국이 출범하자 미국은 제일 먼저 한국을 승인하고 초대 주한 미국대표로 무초(1949년 大使 승격)를 임명하고 한국에서도 초대 주미대사로 장면(張勉)을 임명함으로써 약 반 세기 만에 양국의 공식외교가 재개되었다. 한국은 건국 초기부터 북한의 군사적 위협, 신생국가로서의 경제사정 등으로 대미 일변도의 외교를 펴, 미국으로부터 군사·경제원조를 획득하는 데 집중적으로 노력하였다.
그러나 미국은 제2차세계대전 후 군사비를 삭감해야 할 국내사정 때문에 병력을 감축해야 하였고, 한국에서 전쟁이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는 판단 아래 한국을 미국의 방위선에서 제외, 1949년 6월 500여 명의 병력과 군사고문단만을 남기고 미군을 전면 철수하여, 이것이 1950년 6·25전쟁을 유발(誘發)하는 큰 요인이 되었다. 한·미 관계가 정치·군사·경제면에서 보다 긴밀하게 전개된 것은 6·25전쟁 이후이다. 전쟁이 발발하자 미국 대통령 트루먼은 즉각 군대를 출동시키고 무기를 급송하는 등 결연히 한국에 대한 방어의지를 보이고 38선의 획정을 백지화하여 유엔군을 북진시켰다. 또한 미국은 전시 중의 군사·경제원조뿐만 아니라 전후에도 경제원조를 강화하여 부흥사업을 적극 도왔다. 그러나 정치적으로는 대통령 이승만의 독재성향 때문에 부산 천도시절부터 대통령 트루먼과 마찰을 빚었고, 아이젠하워 대통령 때는 한국의 휴전협정 반대 입장 때문에 심각한 의견대립을 보여, 대통령 이승만은 이를 군사·경제원조와 한·미 상호방위조약 체결로 이끌어 타결지었다.
1960년대의 케네디 대통령 때는 한국의 군사정변과 박정희정권 출범 과정에서 미국이 민정복귀를 강력히 요구함으로써 양국의 불편한 관계가 한동안 지속되기도 하였다. 존슨, 닉슨, 포드 대통령 시대에는 비교적 소강상태를 이루었으나, 특히 1970년대 후반 카터가 대통령에 취임하면서 주한미군철수 문제, 인권문제, 박동선사건(朴東宣事件) 등으로 긴장관계가 또 한번 지속되었다. 한편, 미국은 1953년 10월 ‘한·미상호방위조약’이 체결된 이래 꾸준히 군사원조를 제공하여 한국군 현대화를 도왔고, F16기(機) 등 최신예기를 한국에 배치하여 방어력을 강화하는 데 힘써 왔다. 매년 한·미합동의 팀스피리트 작전 등을 통해 양국군의 실전 능력을 높이고 있다. 또한 1971년 이후에는 연례 한·미안보협의회가 개최되어 한반도의 군사적 현안문제를 협의하여 왔다.
국교개설 이래 한국에서는 이승만·박정희·전두환·노태우·김영삼·김대중 대통령이 방미하고, 미국에서는 아이젠하워·존슨·포드·카터·레이건·부시·클린턴 대통령이 방한, 양국간의 당면문제를 협의하였다. 광복 이후, 특히 6·25전쟁 이후 강화된 미국의 한국에 대한 경제원조는 1961년 초까지 한국경제에 거의 절대적인 비중을 차지하였고, 그 후 현재까지도 무역·자본도입·합작투자 등 경제 전반에 걸쳐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1980년 미국 국제개발처(AID)의 발표에 따르면 미국은 1946년부터 1979년까지 한국에 146억 810만 달러의 경제원조를 제공한 것으로 되어 있는데, 이 중에는 1960년대까지 제공한 무상원조 47억 달러가 포함되어 있다. 그러나 무상원조시대의 한국경제는 미국에 대한 의존적 타성(惰性) 때문에 오히려 경제적 자립의욕을 저해하는 결과를 초래하였고, 1962년 무상원조가 끊어지고 차관(借款)으로 전환되면서 경제가 본격적으로 성장하기 시작하였다.
한국의 대미수출 의존도는 1961년의 16.6%로부터 1968년에는 51.7%로 그 상승곡선의 정점에 달하여 절대적 비중을 차지하였고, 그 후 다각적인 수출정책에 따라 1976년 32.3%, 1989년 12%, 1994년 21.4%로 낮아지고 있다. 미국은 한국에 면화·옥수수·밀·원피(原皮)·원목·종이·철강 스크랩과 같은 1차 원자재를 대종으로 하고 열전자관 등 전자부품과 그 밖의 중화학제품을 수출하고, 한국의 섬유류·전자제품·철강제품·신발류·기계류·합판·합성수지 등을 수입한다. 그동안의 심한 대미무역흑자현상은 통상마찰의 주된 원인이 되었다. 그후 미국은 다각적인 방법으로 대한수출 증가에 주력하였으며, 1994년 현재 대한수출이 215억 7900만 달러, 수입이 205억 5360만 달러로 무역역조는 점차 개선되고 있다. 한편 재미교민은 142만 532명, 체류자는 11만 3045명(1993)이다.
<주한미군의 역사>
주한미군은 미국 태평양군 소속으로, 한반도에 주둔하고 있는 미육군은 태평양 통합사 육군구성군인 태평양육군 산하 미8군 소속 전투사단인 제2기계화보병사단(2nd infantry division), 제19전구지원사령부(19th theater support command) 등이며, 미공군 역시 태평양 통합사 공군구성군인 태평양공군 산하 제7공군 소속 51전투비행단과 8전투비행단이다. 이외에 진해에 미해군 사령부 등이 존재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주한미군 규모는 한국전쟁 당시 최대 32만7천명에 달하기도 했으며 현재는 지상군과 공군을 합쳐 3만7천명 선이다.
주한미군사령관은 한미연합사령관, 유엔군사령관, 주한미군 선임장교를 겸하며 주한미군 사령관은 한국군에 대한 전시작전통제권을 가지고 있다.
또 한미연합사령관으로서 주한미군사령관은 전쟁수행에 대한 궁극적인 책임을 맡고 있기 때문에, 평시에도 전시작전계획의 수립, 한미연합군사훈련의 주관, 조기경보와 전략 및 전투정보 제공을 위한 연합군사정보의 관리를 책임지고 있다. 또한 한미연합군의 경제태세 수준을 최종적으로 결정하는 권한을 지니고 있다.
주한미군의 임무는 한반도에서 북한의 전쟁도발을 막는 전쟁 억지력, 대응력으로서의 역할이다. 또한 냉전시대 대소련 전진기지로서의 역할도 수행해 왔다. 그러나 1990년대 탈냉전시대 이후 주한미군의 필요성에 대한 논의가 있어왔고, 남북관계가 개선되면서 국내외적으로 주한미군의 완전철수를 주장하는 목소리도 나오고 있다.
주한미군은 제2차세계대전 이후 일본의 무장해제를 위하여 1945년 9월 8일 남한에 진주, 현재까지 이르고 있다.
45년 주둔한 이후 48년 남한 단독정부 수립 전까지 군정을 실시하다가 유엔총회의 결의로 48년 6월 29일까지 군사고문단 500여 명만 남긴 채 철수하였다.
그러나 6·25가 일어나자 유엔군 자격으로 재주둔하였는데, 53년 휴전이 성립되었음에도 당시 이승만 정권에 의하여 그해 10월 1일 체결된 <한미상호방위조약>에 따라 상주하게 되었다. 이 조약이 바로 미군이 한국에 주둔하게 되는 법적인 근거가 되는 것이다.
한국전이 끝나고 다른 외국군은 철수하기 시작했고 1972년 6월 주한 태국군이 마지막으로 철수하자 , 미국은 1974년 9월 주한 유엔군사령부, 주한 미군사령부 및 주한 미군 제 8군사령부를 합쳐서 통합사령부를 설치하고, 같은 해 유엔군 작전명령권을 한.미 합참의장회의로 이전시켰다.
그리고 75년 9월 주한미군 군사시설에 게양되었던 유엔기를 철거, 성격상 종래의 연합군적 지위를 벗어났다. 이로서 6.25이후 주한 유엔군의 이름 하에 주둔했던 주둔미군이 명실공히 주한미군으로 주둔하게 되었다.
68년부터 양국의 주요군사정책 협의 조정 기구로 한미연례안보협의회의(scm)가 매년 개최되고 있고, 여기에서 77년 합의된 한미연합사령부(cfc)가 78년 창설되어, 주한미군이 전시, 평시의 한국군에 대한 작전통제권을 행사하게 되었다.
92년에는 한미연합야전사령부(cfa)가 해체되었으며 제24차 scm에서 평시작전통제권을 한국군에 이양하기로 합의, 94년 12월에 이양되었다.
2003년 현재 주한미군의 병력은 3만7489명(지상군 2만8300, 공군 8706, 해군 400, 해병대 83)이다.
<감축과 철수에 대한 나의 견해>
위의 미국과의 관계나 미군과의 관계에서 보이는 것처럼 넓게는 100년 넘게 미국과 교류가 있었다. 인간들 사이에서도 1년의 관계라면 많은 사건들이 생기는데 무려 100여년이면 그만큼 많은 사건들이 발생한 것은 당연하다. 그중에 좋았던 일과 나빴던 일을 나누기는 어렵지만 그것은 시대에 따른 시각에 의해서 나누어지는 것 같다.
우리가 전쟁으로 어려울 때 그들은 우리에게 무한대의 서비스를 제공했다. 물론 금전적인 부분이 크다. 그다음으로 군사적인 문제이다.
미군이 우리나라에 주둔하는 시기는 2차대전이 끝나고, 알지는 못했겠지만 역사적으로 냉전이 시작되는 시기이다. 세계는 소련 측과 미국 측으로 나뉘어 지고, 이데올로기적으로는 사회주의와 자유주의, 경제적으로는 공산주의와 자본주의로 나누어졌다. 중간은 없었던 시절이었다. 당시 우리나라 같은 약 소국가 라면 어느측 이든지 속해야 하는 시기였다. 이미 북한은 소련 측에 속했고, 북한과 싸운 우리는 미국 측에 속하게 되었다. 당연히 미국은 전략적 요충지인 남한에 군대를 보내야만 했고 소련을 막아야 했다.
미국의 도움으로 전쟁에서 그나마 반 정도 땅이라도 건지고 정부를 세우고 나라를 만들었다.
미국과의 관계가 약화되던 시대도 있다 위의 역사에서처럼 박정희 대통령 시대에 그것을 볼 수 있다. 그때 마침 미국에는 70년대 젊은이들의 반전 운동이 정점에 다다랐던 시대였다.
미국은 베트남전의 패배로 그것을 조정하기 어려웠고, 외국에서의 일은 더더욱 신경 쓰기 힘들었을 것이다.
시간이 지나면서 독일의 통일을 맞게 되고, 하나의 사회주의 국가가 사라지는 사건이다. 그리고 소련의 붕괴로 미국은 사상적으로 승리하였다. 이로써 미국은 세계 초일류 강대국이 된 것이다. 이 시점에서 미국에 어떤 주제로든지 그것이 이데올로기든 군사력이든 대항할만한 국가는 없게 되었다. 몇몇 테러 국가들만이 그 활동을 하고 있다. 그리고 최후의 공산주의 국가인 북한이 이제 혼자 대항하고 있다.
세계는 미국이 최근 무력을 사용하는 것을 탐탁지 않게 여기면서도 어쩔 수 없이 손을 들어주고 있다. 그 화살이 북한으로 이제 노골적으로 돌아올 것이다. 하지만 그때도 어쩔수 없을 것이다.
주한미군의 필요성은 어쩌면 없을 지도 모른다. 설마 저 우리보다 못사는 북한이 우리를 칠 수 있을 것인가 라는 생각 때문일지도 모른다. 많은 젊은 여론이 미군을 나가라고 한다.
그렇다면 만약 북한이 남하한다면 우리가 막을 수 있을 것인지도 문제다. 미군이 우리나라에 가지고 있는 무기들을 그냥 놓아두고 갈 것인가 과연 우리만의 무기로 북한을 이길 것인가가 문제가 될 것이다. 많은 피흘림이 있은 후에야 미국이 전쟁에 개입할지도 모르고, 아니면 북한이 이겨서 북한과 미국이 타협할지도 모른다. 어떻게 알겠는가 우리가 그들을 이해할 수가 있는가. 그런 식으로 했다고 해서.
적어도 난 주한미군은 반드시 남아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불공평한 SOFA 문제는 개선되어야 한다. 그들에게 우리나라에 도움을 주라고 오게 한 것이지 피해를 주라고 오게 한 것은 아니다. 세부적인 내용은 모르지만 범죄자 신병인계라든지, 미군부재의 환경오염 문제라든지 여러 가지 들었다.
시대의 상황에 아무리 맞추어 간다 하지만, 우리가 약한 부분은 투자 하지 않는 이상 강해 질 수가 없다. 다른 나라에서 투자를 하고 있는데 우리가 그 투자를 막을 이유는 없다. 우리가 그들에게 종속적인 관계이긴 하지만, 그것을 우리는 잘 이용해야 한다. 우리가 언제 다른 나라를 이끌어 본적이 있는가? 우리가 언제 혼자 힘으로 살아 본적이 있는가? 현실적으로 파악해야 한다. 우리가 살기 위해서는 미군이 아니더라도 다른 나라의 도움이라도 받아야 한다.
그럴 수가 없다면 다른 분야를 이제 경시 하고, 군사 분야를 조금 더 강조해야 한다.
[펌] 미국 외교정책 (0) | 2005.03.1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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