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스트리아 병합 (1938) : 제1차 세계 대전 후 오스트리아(Austria)는 오스트리아·헝가리·체코슬로바키아로 해체되어 분립함으로써 중요한 산업 기지를 잃어 약소국이 됐다. 1930년대 후반이 되면서 차츰 나찌가 세력을 확대했다. 강령에 영토 확보를 내세웠던 나찌스의 제1 목표는, 600만 이상의 독일인이 살고 있는 히틀러의 고향인 오스트리아였다. 그러나 오스트리아에는 나찌화를 두려워하는 자가 있었고, 프랑스도 독일의 강대화를 베르사이유 체제의 붕괴라 하여 반대하고, 이탈리아는 합병으로 직접 독일과 국경을 접하게 되므로 이를 반대하고, 헝가리, 영국도 각기 그들의 입장에서 이를 반대하였다. 오스트리아 나찌스는 돌푸스를 암살하고 일거에 합병을 실행하려 했으나, 이 사건은 정부에 의해 진압되고 오히려 국제적 반대론을 경화시키자, 독일은 오스트리아의 병합을 일시 단념했다. 그러나 영국, 프랑스, 이탈리아의 스트레자 전선은 영국의 영·독 해군 협정 이후 깨어졌으며, 이디오피아 침략은 이탈리아를 독일에 접근시켜 1937년 9월 히틀러와 뭇솔리니의 브렌네르 회담에서 제휴가 이루어졌고, 1938년에는 독일의 압력과 오스트리아 나찌스의 활동이 더욱 격화되자, 돌푸스의 뒤를 이은 슈시니크 수상은 독일의 압력으로 오스트리아 나찌스의 지도자 자이스잉크바르트를 내무상의 자리에 앉히면서도 이 문제를 국민 투표에 붙여 해결하려 했다. 이것은 나찌스에게 불리한 것이므로 독일은 3월 11일 최후 통첩으로 오스트리아를 위협하여 슈시니 크를 사직시키고, 잉크바르트 내각을 조직하게 하여 그 내각의 요청으로 12일 독일군이 대거 진입하여, 그 이튿날 독일, 오스트리아 양 정부는 정식으로 합병을 선언하였다. 이로써 오스트리아는 나찌스 독일의 한 주로 전락되고 잉크바르트는 그 총독이 되었다. 이 사건에 이탈리아는 불만을 나타내고, 영국, 프랑스는 전쟁까지 치를 의사는 없어 동조하는 결과가 되었는데, 이러한 결과는 곧 뒤이어 있는 나찌스의 체코슬로바키아의 해체와 폴란드 침략을 허용하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그런데 잉크바르트는 전후에 교수형에 처해졌다. ◑ 독일의 체코슬로바키아 점령과 뮌헨 회담 : 수데텐 지방은 원래 독일 영토였으나 베르사유 조약에서 독일의 힘을 약하게 하기 위해 체코슬로바키아의 영토로 만들었다. 나치는 1938년 봄부터 수데텐 전체 인구의 70%를 차지하고 있던 독일계 주민을 꼬드겨 자치 운동을 벌이게 하였고, 히틀러가 이 운동을 이용하여 수데텐 지방을 요구하자 유럽에는 전운이 감돌았다. 이 문제를 논의하기 위해 영국의 체임벌린, 프랑스의 달라디에, 독일의 히틀러, 이탈리아의 무솔리니가 뮌헨 회담을 개최하여 독일이 더 이상의 영토를 요구하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수데텐 지방 병합을 승인하였다. 그런데 체코슬로바키아의 운명을 결정하는 이 중요한 회담에 정작 체코의 대표는 참석할 수 없었으며, 당시 체코와 상호 원조 조약을 맺고 있던 소련도 제외되었다. ……히틀러는 체코 슬로바키아의 대통령 하하를 베를린으로 불러들여 보헤미아와 모라비아 두 지방을 독일 보호령으로 할 것을 주장하였다. 하하가 외상과 함께 히틀러가 기다리고 있는 회의실로 들어가자 책상 위에는 "체코 슬로바키아 대통령은 체코 국민의 운명을 신뢰의 마음을 담아 독일 제국 총통의 수중에 일임한다" 라는 터무니없는 문서가 준비되어 있었다. 문서의 내용을 조금이라도 완화시켜 보려는 하하의 노력은 모두 수포로 돌아갔다. 너무나 비통한 나머지 두 번이나 실신한 늙은 하하를 그때마다 강정제로 각성시켜 일으켜 세웠으며 기력이 다한 대통령은 25일 아침 마침내 문서에 서명하였다. 이때 이미 국경을 넘고 있던 독일군은 그날 즉시 체코의 전 영토를 점령하고 …… 독일, [그레이트 브리튼-북아일랜드] 연합 왕국, 프랑스 및 이탈리아는, 수데텐, [즉 체코슬로바키아 안의] 독일인 지역을 독일에 넘겨주는 것에 관해 이미 원칙적으로 도달한 합의를 고려하여, 이를 규정한 아래 조건 및 그에 따르는 조치에 관해 동의하였다. 나아가 이 협정에 따라 네 나라는 각각 그 실시를 확실히 하기 위해 필요한 조치에 관해 책임을 진다. 1. [수데텐의] 인도(引導)는 10월 1일부터 시작된다. 2. 연합 왕국, 프랑스 및 이탈리아는 다음의 사항에 동의한다. 즉, 인도는 현재의 시설을 조금도 파괴하 지 않고 10월 10일까지 완료할 것. 또 체코슬로바키아 정부는 그 시설에 손상을 입히지 않고 인도할 책임을 진다. 3. 인도를 규정한 조건의 세부 항목은 독일.연합 왕국.프랑스.이탈리아 및 체코슬로바키아 각국 대표로 구성된 국제 위원회에서 정한다. 4. 독일인이 우세한 위치를 차지하는 지역에 대한 독일군의 단계적 점령은 10월 1일부터 시작된다. 부속 지도에 나타난 4 지역은 다음의 순서로 독일군에게 점령된다. ……압도적으로 독일적 성격을 띠는 나머지 지역은 즉시 위에서 말한 국제 위원회에서 확인하여 10월 10일까지 독일군에게 점령된다. ▶협정 부속 문서 * 연합 왕국 및 프랑스 양국 정부는 부당한 침략에 대해 체코슬로바키아의 새 국경을 보장해 주는 것에 관해서, 9월 19일 영.프 제안 제 6항의 신청을 유지하는 것을 바탕으로 하여 앞의 협정에 참가하 였다. * 체코슬로바키아에서 폴란드 인과 헝가리 인의 소수 민족 문제가 해결될 때에는 독일 및 이탈리아도 각각 체코슬로바키아에게 [새 국경을] 보장해 준다. --뮌헨 4국 협정(1938년)에서 영국과 프랑스의 압력 아래 체코슬로바키아를 분할한다는 것은 서유럽의 민주주의가 나치의 위협에 굴복한다는 것과 같다. 그러한 붕괴는 영국과 프랑스에 평화와 안전을 가져다 주지 않을 것이다. 그것은 오히려 두 나라를 더욱 연약하고 위험한 상태로 이끌어 갈 것이다. 체코슬로바키아의 중립화만으로도 독일군 25개 사단의 해방을 의미하는 것이고, 그것은 서부 전선을 위협할 뿐 아니라, 승승장구하고 있는 나치에게 흑해로 나가는 길을 터 줄 것이다. 위협을 받은 것은 단지 체코슬로바키아만이 아니라 모든 나라의 자유와 민주주의인 것이다. 작은 나라[체코슬로바키아의 영토]를 늑대[독일]에게 던져 줌으로써 안전을 획득하리라고 믿는 것은 치명적인 오판이다. 독일의 전력은 영국과 프랑스가 방위에 필요한 대책을 완성하기도 전에 짧은 기간 안에 커갈 것이다. --뮌헨 협정에 항의하는 처칠의 성명서(1938년) ☞ 뮌헨 회담에서 영국과 프랑스가 독일의 요구를 들어주자, 처칠(Winston Churchil, 1874∼1965)은 뮌 헨 협정의 영향에 대해 경고하면서 위의 성명을 발표하였다. 그 내용은 1953년 노벨 문학상 수상작인 《제2차 세계 대전 회고록》에 담겨 있다. ◑ 독.소 불가침 조약(1939년) : 절대로 서로 화합할 수 없을 것으로 보이던 독일과 소련은 1939년 8월 23일 모스크바에서 갑자기 불 침 조약을 체결하여 세계에 충격을 주었다. 당시 소련의 의도는 이 조약을 체결함으로써 독일과의 전쟁을 일시적이나마 연기해 국력을 강화시키는 데 있었으며, 또한 뮌헨 협정을 무시하고 영토적 야욕을 드러낸 히틀러는 전쟁이 급박한 상황에서 소련의 개입을 막기 위해 불가침 조약의 체결이 필요하였다. 독일은 이 조약으로 동.서 양면 작전의 불리함을 피해 1주일 뒤 폴란드에 침입하여 제 2차 세계 대전의 발발을 가져 왔다. 독일이 폴란드로 진격하자 소련도 폴란드의 일부를 차지하였다. 이로써 양국의 이해 관계가 일치하였으나, 독일군의 발칸 진출로 불가침 조약은 파기되고 독일과 소련의 전쟁이 시작되었다. 독일 정부와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연방 정부는 양국 간의 평화를 더욱 확실히 해 두기를 원해, 1926년 4월 독일과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사이에 체결된 중립 조약의 기본적 조항을 바탕으로 아래의 협정에 도달하였다. 1. 두 나라는 단독으로 또는 다른 나라와 연합해서 서로에게 어떠한 폭력 행위도, 어떠한 침략 행위도, 어떠한 공격도 하지 않을 의무를 진다. 2. 만약 두 나라 중 한 쪽이 제 3국으로부터 공격을 받게 되는 경우, 다른 한 쪽이 어떠한 방식으로 도 제 3국에 원조를 하지 않는다. 3. 두 나라 정부는 공통의 이해에 영향을 미치는 문제에 관해 정보 교환을 위한 협의를 하기 위해 앞 으로 끊임없이 서로 연락한다. 4. 조약 체결국은 어느 쪽도 직접 또는 간접으로 다른 한 쪽을 목표로 한 강대국의 결합에 참가하지 않는다. 5. 만약 조약 체결국 사이에 여러 가지 문제를 둘러싸고 분쟁 혹은 충돌이 일어나는 경우, 쌍방은 오 직 우호적인 의견 교환으로써만, 또 필요하다면 조사 위원회를 설치하는 것에 의해서만 그 분쟁이나 충돌을 해결한다. 이 조약 전문은 독일어와 러시아어 각 1통씩 만든다. ◑ 제 2차 세계 대전(1939.9.-1945.8.) : 독일·이탈리아·일본을 중심으로 하는 전체주의 국가들로 구성된 추축국의 침략에 의해, 민주주의 국가군인 연합국과의 사이에 일어났던 전쟁. 그 도화선이 된 것은 독일의 단찌히 및 폴란드 회랑에 대한 요구였다. 1939년 9월 1일 새벽 4시 45분, 폴란드의 단치히 항에 정박해 있던 독일 순양함이 별안간 항구의 요새를 공격했다. 그와 동시에 독일군 정예 부대가 폴란드 국경을 넘었고 독일군은 삽시간에 폴란드를 제압했다. 그러자 9월 3일 영국과 프랑스가 독일에 선전 포고를 하여 전쟁이 시작되었다. 독일은 곧 폴란드를 압도하여 소련과 이를 분할하고는, 다음 해 1940년 5월에는 돌연 서부로 진출, 네덜란드를 5일 만에, 벨기에를 2주일 만에 항복 시켰다. 그리고 난공불락의 마지노 선을 돌파, 프랑스로 쳐들어갔다. 6월 10일 이탈리아가 영국과 프랑스에게 선전 포고를 하여 독일측에 가담했다. 14일에 파리는 함락되고 말았다. 독일은 페탱을 내세워 괴뢰 정부인 비시 정권을 수립했으며 영국 런던을 공습했다. 이에 대해 드골을 중심으로 한 프랑스의 저항 세력은 런던에 임시 정부를 세우고 항전 결의를 표명했다. 독일은 이어 발칸 작전을 개시했다. 유고슬라비아와 그리스를 점령한 다음, 불가리아와 루마니아를 독일측에 가담시켰다. 1941년 6월 22일 독일군은 독·소 불가침 조약을 깨뜨리고 일제히 소련으로 진격했다. 동유럽에 있어서의 이해의 충돌과 전쟁이 장기화됨에 따라 우크라이나의 곡창지대와 카프카즈의 유전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독일군은 파죽지세로 진격, 소련의 항복이 눈앞에 다가온 듯했다. 불의의 기습을 당한 소련은 막대한 손실을 입었다. 국토의 서반부가 독일군 손안에 들어갔고 자그만치 2천만 명에 달하는 사상자가 발생했다. 이는 학살로 죽어간 유태인의 3.5배에 해당하는 숫자이다. 1940년 9월 독일·일본·이탈리아는 삼국 동맹을 맺었다. 일본은 대동아 건설을 외치며 남방 진출에 나섰다. 1941년 12월 8일 일본은 진주만을 기습했다. 독일과 이탈리아도 미국에 선전 포고를 했다. 이리하여 전쟁은 문자 그대로 세계 대전으로 전화는 전지구 표면으로 확대되었다. 독일을 중심으로 하고 이탈리아가 이를 보조한 유럽 전쟁은 미국이 참전하고 소련이 동부 전선에서 격전을 벌이면서 점차 연합국측의 승리로 기울었다. 태평양에서의 양상도 비슷했다. 일본은 초기에 기습 공격으로 주도권을 장악, 1942년 전반까지 필리핀, 말레이지아, 버마, 네덜란드 령 동인도, 서남 태평양 제도를 차례로 점령하여 동남 아시아 전역을 손에 넣었다. 대동아 공영권의 꿈은 현실로 이루어질 듯이 보였다. 그러나 중국 대륙에서 의외로 시간을 끌었고, 태평양 일대의 남방 전선은 너무 넓어서 보급로 유지가 곤란했다. 1942년 6월, 미국은 미드웨이 해전에서 승리를 거둬 승기를 잡았다. 그리고 8월에 솔로몬 군도의 과달카날 섬에 상륙했다. 제공권과 제해권을 잃은 일본은 각 지역에서 고립되었다. 그리하여 1944년 6월 사이판에서 전멸당하고 10월에는 레이테 만에서 함대의 대부분을 잃었으며, 1945년에는 필리핀을 빼앗겼다. 한편 1944년 6월 아이젠하워가 이끄는 연합군이 프랑스 노르망디 해안에 상륙하는 데 성공, 독일군은 밀리기 시작했다. 연합군은 파리를 수복하고 라인 강으로 진격, 1945년 4월 소련군과 엘베 강에서 만나 독일 진격을 눈앞에 두었다. 4 월말, 무솔리니가 이탈리아 유격대에 체포되어 처형당했다. 5월 1일 소련군은 독일의 수도 베를린에 입성했다. 히틀러는 전날 자결하였고, 독일은 5월 7일 항복, 이로써 유럽에서의 전쟁은 끝이 났다. 한편 일본은 연합국의 무조건 항복 권고를 거부하고 최후의 항전을 하다가 1945년 8월 6일과 9일 미국이 히로시마·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을 투하하고, 8월 8일 소련이 선전포고를 하여 만주로 진격하자 15일 무조건 항복을 선언했다. 이로써 6년에 걸친 제2차 세계대전은 끝이 났다. 연합군측 49개국, 동맹국측 8개국, 동원병력 1억 1천만, 인류의 5분의 4가 전쟁의 소용돌이에 휘말렸고, 전사자 2천 7백만, 민간인 희생자 2천 5백만, 총 5천만이 넘는 인명이 희생되었다. 이는 제1차 세계대전의 3배에 달하는 숫자였다. ◑ 히틀러의 개전 연설(1939년) 오랜 기간에 걸쳐 우리는 베르사유의 명령이 제시한 가혹한 문제로 계속 고민해 왔지만, 이젠 문제가 더 이상 참을 수 없을 정도로 악화되고 변질되어 있는 것이다. ……베르사유의 명령은 우리에겐 법률이 아니다. 권총을 머리에 들이대고 수 백만 인민을 굶주림으로 협박하여 어쩔 수 없이 서명하게 만들고, 게다가 그렇게 강제적으로 서명시킨 문서를 엄연한 법률로 선언하는 것은 용납할 수 없다. 나는 평화적 협의를 제창해 단치히 [자유시] 및 [독일 본토와 동프로이센 사이의] 회랑 지대 문제의 해결을 도모해 왔던 것이다. 이 문제가 해결되어야만 한다는 것은 명백하다. ……우리의 제안은 거절되었다. 그뿐이 아니다. 그것에 대한 회답은 동원령과 과격한 테러 행위로, 우리 민족에 위협과 강압을 증대시키는 것으로, 나아가 단치히 자유시에 대해서도 경제적, 정치적으로 또 최근 몇 년간에 걸쳐서는 군사적 수단과 교통 수단으로 서서히 눌러 죽이려는 전술로 나타났다. 폴란드는 단치히 자유시에 대한 공격을 개시하였다. ……우리의 목적은 무엇인가? 나는 첫째로 단치히 문제, 둘째로 회랑 문제를 해결하고, 세째로는 독일과 폴란드 관계를 고쳐 평화적 공존 관계를 성립시키기 위해 노력할 것을 결의하는 바이다. 나는 지금의 폴란드 정부가 이러한 변화의 실현을 승인하든지, 아니면 새 정부가 나타나 그런 용의를 보일 때까지는 싸울 결심이다. ……어젯밤 폴란드 정규군 최초의 발포가 우리 영토 쪽으로 있었다. 오전 5시 45분부터 우리 군대도 이에 응해 싸우고 있다. 그러나 앞으론 폭격에는 폭격으로 대응할 것이다. 독가스로 도전하는 자에게는 또한 독가스로 응할 것이다. ……이 전쟁 중에 만일 내게 무슨 일이 있으면, 내 첫번째 후계자는 게링이다. ……나의 모든 생활은 오로지 우리 민족, 그리고 민족의 부흥 및 독일을 위한 오랜 투쟁일 뿐이었다. ……나는 전 세계를 향해 단언하건대, 1918년 11월[제 1차 대전에서 독일이 항복한 달]은 결코 독일 역사에서 되풀이되지 않을 것이다. 나는 내 자신이 언제라도 내 한 목숨을 민족과 나라를 위해 바칠 각오가 되어 있듯이, 국민들도 그래 주기를 바라는 바이다. …… ☞ 독일 국방군은 1939년 9월 1일 새벽녘에 폴란드 침략을 개시하였는데, 이 날 오전 10시 히틀러는 국회를 소집하여 전쟁을 시작하게 된 배경과 전쟁에 임하는 자신의 결의를 위의 연설을 통해 밝혔다. 이 전쟁의 발단이 된 단치히와 회랑 지대는 베르사유 조약에 따라 독일이 폴란드에 넘겨 주었던 곳이었으나, 히틀러가 등장해 이곳의 반환을 요구하고 나섰던 것이다. ◑ 단치히(Danzing) : 폴란드 회랑 지대는 동프로이센과 독일 본토 사이의 폴란드 땅이다. 폴란드 분할 점령시 프로이센령이었으나 1차 대전 후 폴란드에 귀속되었다. 지금 포매른 지방으로 불리는 이 곳의 해안에 독일인이 90% 이상 거주하는 단치히란 항구 도시가 있다. 1차 대전 후 열강의 공동 관리하에 있다가 자유시가 되었으나 폴란드의 간섭이 심하였다. 나치 독일은 이 곳을 요구하여 세계 대전이 발발하였다. 지금은『그다니스크』로 불린다. ◑ 마지노 선(Maginot Line) : 프랑스가 독일 국경에 만든 난공 불락을 자랑하던 대요새선. 1930년부터 약 200억 프랑의 비용을 들여 근대 과학의 정수를 모아 구축하였다. 건설을 주장한 당시 육군상 A.마지노의 이름을 따 명명되었다. 프랑스는 라인란트의 주둔군을 철수시킨 후 이 요새선에 의해 독일에 대한 안전을 확보하려 했으나, 독일도 곧 지이크프리이트 선(線)을 구축하여 대항했다. 제2차 세계 대전에서는 1940년 6월 독일군에게 어이없이 돌파되어 전차 공격에는 견고하나 공군력에는 무력함을 드러냈다. ◑ 비시 괴뢰 정부(Gouvernement de Vichy; 1940-1944) : 2차 대전 중의 프랑스의 친독일 정권. 1940년 6월 13일 독일군의 파리 점령으로 페탱(Petain) 장군은 22일 히틀러와 정전 협정을 체결하고 나찌스에 협력할 것을 서약한 다음 북부 프랑스는 독일에 양도하고, 남부 프랑스에는 휴양지로 유명한 비시를 수도로 하여 제1차 대전의 영웅 패탱을 원수로 하는 친독 정권이 수립되었다. 웨강, 다를랑, 뒤에 라발이 참가하였다. 비시 정부의 수립은 프랑스 내의 반독일 레지스탕스 운동을 완화시키기 위해서 프랑스가 독립을 유지하고 있는 듯이 선전하려는 것이었으나, 레지스탕스 운동은 더욱 활발해지기만 했다. 1940년 7월 11일 제3공화정 헌법을 폐지하고 신헌법을 발포, 대통령제를 중지하고 페탱을 행정·사법을 통할하는 최고 원수로 삼았다. 원수는 사원 및 대의원을 정회하고, 새로이 최고 재판소를 신설하여 제3 공화정부의 지도자를 숙청하였다. 이윽고 라발이 음모를 꾸며 파면되고, 대독 협력 및 정부내의 모순과 레지스탕스 운동의 격화로 시종 동요하였으며, 독일의 패배와 더불어 와해되고 괴뢰 정부 각료들은 반역죄로 단죄되었다. ◑ 페탱(Petain Henri Philippe ;1856-1951) : 프랑스의 장군, 정치가. 제1차 세계 대전 중 허다한 공을 세웠는데, 특히 1916년 봄의 베르덩 공방전의 성공으로「베르덩의 영웅」이란 명성을 획득하고, 전후에 원수가 되었다. 1925∼1926년의 모로코 반란 때는 프랑스 군사령관, 1934년 국방상, 후에 국방 최고 위원회 위원 등 국방상 중요한 지위에 있었다. 1939년에는 내란중의 에스파니아 대사에 부임하여, 프랑코측과의 친선을 위하여 노력했다. 제2차 세 대전이 발발하자 레노 내각의 부수상에 취임했으나, 1940년 6월 파리 함락으로 레노 수상이 사직한 후는 수상이 되어, 독일에 항복하고, 휴전 협정을 체결하였다. 이어 비시 정부를 세우고 제3공화정 헌법을 폐지한 다음, 스스로 국가 주석에 취임하여 라발과 함께 독일에 협력하여 독재적 전제주의 국가 체제를 만들어 냈다. 해방 후 1945년에 체포되어 대독 협력의 죄로 사형 선고를 받았으나, 종신 금고로 감형되었다. ◑ 레지스탕스 운동(Mouvement de Resistance) : 프랑스어로 저항 운동의 뜻으로 제 2차 세계 대전 중 프랑스 국민의 독일 점령군 및 그 괴뢰인 자국의 비시 정부에 대해 전개한 저항 운동을 말하는 것이 보통이다. ▶ 제1기: 1940년 6월 22일의 프랑스군의 항복으로부터 이듬해 6월 22일의 독·소 개전까지. 제 3공화정의 해체에 의해 독일 점령군과 비시 정부의 파시즘적 지배가 시작되고, 폐탱과 히틀러의 회견에서 대독 협력이 서약되었으며, 프랑스 경제는 무거운 부담을 져, 11월 11일 파리 학생들의 에트왈 개선문 광장에서의 데모가 일어나 국민의 대독 비협력 태도가 적극화하기 시작한 시기이다. ▶ 제2기: 독·소 개전으로부터 1942년 11월 소련군의 스탈린그라드 반격, 미·영군의 북아프리카 상륙, 독일군의 프랑스 전토 점령에 대응하는 툴롱 항의 프랑스 함대 자결까지이다. 점령군은 노동자 40만의 징발 요구, 인질의 대량 처형(샤토브리앙, 몽 발레리앙 사건 등)으로 억압을 강화하자, 레지스탕스 운동은 활발하게 되고, 군용 열차·시설의 파괴 등이 조직화되었다. ▶ 제3기: 1942년 11월부터 해방까지이다. 연합군 공격에 힘을 얻어 공세로 전환, 조직은 전국적 통일을 이루어 1943년 3월, 전국 저항 평의회가 성립되었다. 그 후 1943년 6월에는 알제리에서 드골, 지로의 프랑스 국민 해방 위원회가 성립되어, 연합국의 승인을 얻었다. 이어 독일에의 징용을 거부한 사람은 마키(Maquis: 2차 대전중 중동부의 산중에 들어가 독일 점령군에 대항한 프랑스인 게릴라)가 되고 무장 저항 단체는 국내 프랑스군으로 조직되었다. 1944년 6월 연합군의 노르망디 상륙 이후, 전국적 무장 봉기가 시작되었으며, 연합군 도착 이전에 파리를 해방시켰다. 레지스탕스 운동은 다양한 단체와 조직으로 구성되었으나, 프랑스의 해방을 위해 굳게 결속되어 끝까지 통일을 유지하였다. 프랑스는 한 번의 싸움으로 패했다. 그러나 프랑스는 전쟁 자체에서 진 것은 아니다. 정부 수뇌들은 두려움에 빠져 명예를 잊고 국토를 굴종에 빠뜨려 항복하고 말았다. 그러나 모든 것이 끝난 것은 아니다. 아무 것도 잃은 것은 없다. 왜냐하면 이 전쟁은 세계 전쟁이기 때문이다. 자유 세계에는 아직 거대한 힘이 감추어져 있다. 머지않아 이 힘이 적을 쳐부술 것이다. 그 날, 프랑스는 승자의 자리에 있어야 한다. 그 때, 프랑스는 자유와 위대함을 되찾을 것이다. 그것이 우리의 목적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모든 프랑스 인이 어느 곳에 있든 간에 행동과 희생과 희망을 우리와 함께 하기를 바란다. 우리 나라는 지금 생사(生死)의 위기에 있다. 프랑스를 구하기 위해 우리 모두 싸우자. 프랑스 만세! --드골의 <모든 프랑스 인에게 고함>(1940년) ☞ 1940년 6월 17일 페탱이 이끄는 프랑스 정부가 독일에 항복하던 날, 드골은 비행기로 영국으로 망명하여 다음 날인 18일 런던에서 라디오로 위의 포고문을 발표하였다. 레지스탕스 기간 중 포스터의 형태로 널리 이용된 이 포고문은 프랑스가 독일에게 패한 직후 프랑스 인들에게 커다란 자극을 주었다. ◑ 독.소 개전에 관한 히틀러의 연설(1941년)에서 독일 국민 여러분, 국가 사회주의자 여러분! 신중함에 신중함을 더해서 오랫동안 침묵을 지켜야 했던 내가 마침내 숨김없이 말할 수 있는 때가 왔다. ……이전에 독일 민족은 러시아의 여러 민족에 대하여 적대 감정을 품은 적이 없었음에도 불구 하고, 모스크바에 있는 유대인 공산주의자들은 독일뿐만 아니라 유럽의 모든 땅에 불을 지르려고 실로 10여 년 호시탐탐 기회를 엿보고 있었던 것이다. 독일은 잠시라도 국가 사회주의적 세계관을 러시아에 퍼뜨리려고 기도한 적은 없다. 오히려 모스크바의 유대인 공산주의자들이야말로 우리와 다른 유럽 여 러 민족들을 강제로 지배하려고 변함없는 노력을 계속해 왔던 것이다. 게다가 그 수단이란 것이, 단지 이데올로기만이 아니고, 무엇보다도 군사력을 가지고 그렇게 했던 것이다. 1939년 가을과 1940년 봄에 는 [영.소 제휴의] 결과가 비로소 현실적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러시아는 군사력으로 핀란드뿐 아니라 발트 해의 여러 나라까지도 예속시키려고 했지만, 그 당시에는 이들 여러 나라를 외부로부터의 위협에 서 미리 보호한다고 하는 황당무계한 주장과 함께 갑자기 행동에 나선 것이다. 그 대상은 바로 다름아 닌 독일이다. 우리 병사가 1940년 5월 5일부터 서부에서 영.프군을 격파하고 있을 때, 우리 동부 국경 에서 러시아의 군사적 위협은 점점 증대하고 있었다. ……이젠, 단순히 방관자적인 태도를 지키는 것 은 그저 아무 것도 하지 않는 죄만이 아니라, 독일 국민에 대한, 아니 유럽에 대한 범죄가 될 때가 온 것이다. 독일 육군은 영국과의 전쟁이 끝나기 전에 전격전으로 소련군을 격파할 준비를 해야 한다. 이를 위해 육군은 기습 공격을 받을 경우 점령 지구의 안전을 보장하는 데 필요한 부대를 제외하고는 모든 동원 가능한 부대를 사용할 필요가 있다. 공군은 지상 작전을 짧은 기간에 끝낼 수 있게 하고, 적의 공군이 동독 지역에 펼칠 공격의 피해를 최소한으로 줄이는 데 필요한 부대를 동원하여 동부 전선의 육군을 원조할 것이다. ……동부 전선이 전투 중에 있다 할지라도 해군의 주력은 영국과의 전쟁에 집중되어야 한다. 나는 예정된 작전 개시일로부터 8주 이내에 소련에 대한 모든 군대의 집결 명령을 내릴 것이다. 준비에 많은 시간이 걸리는 것은 곧 바로 착수에 들어가 1941년 5월 15일까지는 완료시켜야 한다. 그러나 가장 중요하게 생각되는 일은 우리의 공격 의도가 발각되지 않도록 하는 것이다. --히틀러의 소련 공격 작전 준비에 관한 비밀 명령(1940년)에서 ☞ 1941년 6월 22일 소련과의 전쟁 시작을 앞두고 히틀러가 내린 포고문이고, 다음의 것은 그보다 6개월 정도 앞선 1941년 12월 바르바롯사 작전이라는 암호명으로 불린 소련 공격 작전 준비에 관한 비밀 명령이다. ◑ 히틀러의 유럽 새 질서 계획 러시아 지역으로 독일인을 이주시킬 때 '독일국 농민'은 아주 잘 꾸며진 집단 거주지에 살지 않으면 안 된다. 독일인의 농장과 관청은 훌륭한 건축물로 구성되고, 총독 관저는 궁정의 장엄함을 갖추고 있어야 한다. 독일 이민이 사는 도시를 둘러싼 30km∼40km 내의 지역에 환상지대(環狀地帶)를 만들어, 그곳에 아름다운 농촌을 건설하고 최상급 도로로 농촌들을 연결시킬 필요가 있다. 러시아 인들은 독일 이민들과는 완전히 판이한 별세계에서 살게 하여 어떤 문명 시설도 누리지 못하도록 하고 방치해 두는 걸로 족하다. 그저 그들은 독일인에게 무조건 복종하여야 한다. 만약 그들이 혁명을 일으킨다면 그들 마을에 각각 2,3발의 폭탄을 퍼부어 마을 전체를 전멸시켜 버려야 한다. ◑ 롬멜(Rommel, Erwin ;1891-1944) : 독일의 군인으로 1910년에 육군에 들어가 제1차 세계 대전 때에는 중위로서 종군하였다. 전후 한때 튀빙겐 대학에 재학하고 군으로 복귀하여, 1933년 대위로 나찌스에 입당한 후 1938년에는 히틀러의 친위대장을 지냈다. 제2차 세계 대전에는 1940년 봄, 서부 전선에서 제7 전차 사단을 지휘하여 공을 세우고, 1941년 2월 독일의 아프리카 군단 사령관이 되었다. 약소한 병력으로 영국군을 전(全)키레나이카에서 격퇴, 이집트 국경에 이르렀으나, 병력과 군수품의 부족으로 영국군의 반격을 받아 빼앗겼다. 1942년 독일군은 공군력을 강화하고 롬멜이 반격에 나서 용감하고, 교묘한 작전에 의하여 전키레나이카를 탈환하고, 이집트로 침입, 6월말에는 알렉산드리아 서방 100Km까지 육박하였다. 그러나 독일의 병력과 보급력이 이에 다하여 영국군의 반격을 받고 후퇴하지 않을 수 없었다. 히틀러는 퇴각을 허락하지 않았으나, 롬멜이 독단으로 후퇴하여 병력의 소모를 막았다. 11월 중에 키레나이카를 잃고, 1943년초에는 트리폴리 지방을 잃자 롬멜은 독일군의 아프리카로부터의 철수를 히틀러에게 요구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고, 본국에서의 병 요양을 명받았다. 1943년 북프랑스 방면군 사령관으로 전보되고, 1944년 독일 방위군 총사령관이 되었다. 그 해 6월 영·미군이 진입하자 독일군의 패배가 명백해짐에 따라「전면적 패배가 불 가피해진 이상 히틀러는 적절한 결론을 내야 할 시기다」라는 요구를 히틀러에게 하고, 서부 전선에 있어서의 전투 정지를 행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공군의 폭격으로 중상을 입었고, 히틀러 암살 미수 사건에 연좌된 혐의로 그 해 10월 육군 병원에서 자살을 강요당했다고 한다. ◑ 이탈리아의 항복 : 1943년 7월 시칠리아 섬이 연합군에게 함락되고 연합군이 이탈리아 본토에 진입했다. 이와 동시에 무솔리니의 반대파인 바돌리오가 쿠데타를 일으켜 무솔리니는 권력을 잃고 체포됐다. 새로 정권을 잡은 바돌리오 정부는 곧 파시스트 당을 해산하고, 9월에는 국왕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3세와 함께 연합국에 무조건 항복했다. 이어 10월에는 독일에게 선전 포고를 했다. 이렇게 프랑스의 패배를 지켜보고 제2차 세계 대전에 참가했던 이탈리아는 가장 일찍 추축국 진영으로부터 탈퇴했다. 한편 체포됐던 무솔리니는 이탈리아의 아부루치 산맥의 한 호텔에 유폐되었으나 같은 해 9월 12월 히틀러의 명령을 받은 독일 친위대 부대장 스코르체니 대위를 비롯한 9명의 병사가 낙하산 부대의 엄호를 받으면서 특수 글라이더를 사용해 몇백 명의 이탈리아 헌병의 감시 속에서 극적으로 무솔리니를 구출하는 작전을 성공시켰다. 그 뒤 무솔리니는 북 이탈리아에 새로운 파시스트 정부를 수립하고 한동안 연합국에 대항했으나 1945년 4 월 28일 파르티잔에게 체포되어 총살됐다. ◑ 태평양 전쟁 : 일본은 1941년 12월 7일 진주만을 기습 공격함으로써 미국과의 전쟁, 즉 태평양 전쟁에 들어갔다. 그런데 그 때 주미 일본 대사는 기습 공격이 시작되고 나서 1시간이나 지나고 나서야 본국으로부터의 통첩을 미국에 전달하였다. 그 통첩의 내용은 현재 진행 중에 있는 일본과 미국과의 교섭은 이제 더 이상 의미가 없다는 것이었을 뿐 거기에는 어떤 군사적 행동이나 전쟁에 관한 암시도 들어 있지 않았다. 다음은 당시 미국의 국무장관이었던 헐(Cordell Hull, 1871∼1955)의 회고록 중의 일부로, 국제 상식을 무시한 일본의 행동에 대한 분노가 담겨 있다. 일본의 진주만 기습은 그 동안 중립을 지켜 오던 미국이 제 2차 세계 대전에 참전하게 되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노무라[주미(駐美) 일본 대사]와 구루스[일본 특사]는 2시 20분에 내 방에 들어왔다. 나는 냉정하게 그들은 쳐다보지도 않고 의자에 앉기를 권하지도 않았다. 노무라는 주저하는 태도로 "정부로부터 오후 1시에 문서[최후 통첩]를 건네주도록 훈령을 받았으나, 해독하기가 어려워 늦어졌다"고 말하면서, 일본 정부의 통고문을 나에게 전했다. ……나는 그 통고문을 읽는 척했다. 나는 이미 그 내용을 알고 있었으나, 아는 척하지는 않았다. 두서너 쪽을 읽은 뒤에 나는 노무라에게 "이 문서는 정부의 훈령에 따라 제출된 것인가?"라고 물었다. 그는 그렇다고 대답하였다. 나는 그 통고문을 끝까지 읽고 나서, 노무라 쪽을 향해 그를 쳐다보면서 말했다. "확실히 말해 두지만 나는 과거 9개월 동안 당신과 교섭을 하는 중에 한번도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 그것은 기록을 보면 바로 알 수 있을 것이다. 나는 50년 동안 공직 생활을 통해 이렇게 염치없고 억지와 거짓으로 가득 찬 문서는 본 적이 없다. 지금까지 이렇게 엄청난 거짓말과 억지를 쓰는 나라가 이 세상에 있으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노무라는 무슨 말을 할 눈치였다. 그의 태도는 평온했으나, 나는 그가 커다란 정신적 타격을 받았음을 느꼈다. 나는, 그가 손을 흔들며 뭔가 말하려고 하는 것을 제지하고 턱으로 문을 가리켰다. 두 대사는 말없이 머리를 숙인 채 나가 버렸다. --전(前) 미국 국무장관 헐(Hull)의《회고록》에서 ◑ 대서양 헌장(1941년) 미합중국 대통령과 [그레이트 브리튼-북아일랜드] 연합 왕국의 수상은 아래의 공동 선언에 합의하고, 세계의 더 나은 미래에 대해 그들이 품고 있는 희망의 기초를 이루는 두 나라 국가 정책의 공통 원칙을 선언하는 것을 정당하다고 인정한다. 첫째로, 두 나라는 영토의 확대나 팽창을 결코 원하지 않는다. 둘째로, 두 나라는 관련 국민이 자유롭게 표명한 희망과 일치하지 않는 영토적 변경은 전혀 바라지 않는다. 셋째로, 두 나라는 모든 국민이 그들의 정부 형태를 선택할 권리를 존중한다. 다섯째로, 두 나라는 모든 나라가 노동 기준의 개선, 경제 발전 및 사회 안전을 확보할 수 있도록 경 제 분야에서 모든 나라 사이에 최대한의 협력이 이루어지기를 원한다. 여섯째로, 포악한 나치 독재가 마지막으로 무너진 뒤, 두 나라는 모든 국민이 자기 나라 국경 안에서 안전하게 살아갈 수 있는 수단을 제공하고, 또 이 땅 위의 모든 인류가 공포와 결핍으로부터 자유롭게 생활할 수 있는 평화를 확립하기를 원한다. 여덟째로, 두 나라는 현실적 또는 정신적 이유에서 세계 모든 나라가 폭력 행사를 포기해야 하다고 확신한다. --대서양 헌장에서 ☞ 미국은 원래 1935년의 중립법에 따라 유럽의 전쟁에 개입하지 않겠다는 태도를 취해 왔으나, 1937년 가을부터 루스벨트 대통령은 독일과 이탈리아의 침략 행위에 반대하는 태도를 보이기 시작하였다. 1940년 11월에 대통령에 세번째로 당선된 루스벨트와 영국 수상 처칠은 1941년 8월 대서양 위의 군함에서 회담을 열고, 위의 선언을 발표하였다. 모두 8조로 된 이 헌장에서 제시된 원칙은 제 2차 대전이 끝난 뒤, 국제 연합 헌장에 구체화되었다. ◑ 카이로 선언(1943.11) 루스벨트 대통령, 장제스 총통, 처칠 수상은 각자 군사·외교 고문과 더불어 북아프리카에서 회의를 마치고 다음과 같은 일반적 성명을 발표하였다. 각 군사 사절은 일본에 대한 장래의 군사 행동에 관해 의견의 일치를 보았다. 3대 동맹국은 육·해·공으로 저 잔인한 적국에 대해 가차없는 압력을 가할 결의를 밝혔다. 이 압력은 이미 증대되어 가고 있다. 3대 동맹국[미.중.영]은 일본의 침략을 제지하고, 또 그 나라를 벌하기 위해 이번 전쟁을 치르고 있다. 3국은 자기 나라를 위해 어떠한 이익도 추구하지 않으며, 또한 영토를 확장할 의도도 결코 없다. 3국의 목적은, 일본이 1914년 제 1차 세계 대전이 시작되고 나서 빼앗았거나 점령한 태평양의 모든 섬을 박탈하고, 나아가 만주, 대만 그리고 펑후 제도[대만 해협에 있는 섬들]와 같이 일본이 중국인에게서 빼앗아 간 모든 영역을 중화 민국에 반환시키는 데 있다. 일본은 또 폭력과 탐욕으로 획득한 다른 모든 영역으로부터 쫓겨나야 할 것이다. 앞에서 말한 3대 국가는 조선 인민의 노예 상태에 유의하여, 머지 않은 장래에 조선을 자유롭게 독립시키기로 굳게 결의한다. 위와 같은 목적 아래 3대 동맹국은 일본과 교전 중에 있는 연합국과 협력하여 일본을 무조건 항복시키는 데 필요한, 중대하고 장기간에 걸친 행동을 계속해 나갈 것이다. --카이로 선언에서 ☞ 1943년 11월 22일∼26일 미국의 루스벨트와 영국의 처칠은 이집트의 카이로에서 중화민국의 장제스와 만나 지중해 방면의 작전과 미얀마 반격 작전, 그리고 태평양 전쟁 후의 일본의 처리에 대해 협의한 결과, 영토 확장을 반대하여 일본의 남양 군도·만주·타이완·평후 제도의 반환 및 한국의 독립을 목적으로 하여 일본이 무조건 항복할 때까지 싸울 것을 결의하였으며, 뒤에 포츠담 선언의 기초가 되었다. 특히 이 선언의 중요한 의의는 태평양 전쟁 후의 영토 처리 문제에 대한 방침을 명확하게 결정했다는 것이다. 이 선언은 11월 27일에 서명되고, 12월 1일에 발표되었다. ◑ 테헤란 회담(1943.11) 1. 유고슬라비아에서의 유격대(the Partisan)에 가능한 한 군수품과 장비를 지원하고, 나아가 군단 작전으로 원조하는 데 동의하였다. 2. 군사적 관점에서, 터키가 올해 안에 연합국 편에서 전쟁에 참가할 것을 바란다는 데 동의하였다. 3. 만약 터키가 독일을 상대로 싸우고, 그 결과 불가리아가 터키에 싸움을 걸거나 공격하는 경우, 소비 에트는 즉시 불가리아를 상대로 싸운다고 하는 스탈린 원수의 성명을 확인하였다. 나아가 본 회의에서는 터키를 참전시키기 위한 앞으로의 교섭에서 이 사실을 명백히 표명할 수 있음을 확인하였다. 4. OVERLORD(노르망디 상륙) 작전을 남프랑스에 대한 작전과 연관시켜 1944년 5월 중에 개시할 것을 확인하였다. 본 회의에서는 또한 소비에트 군대가 독일군이 동부 전선에서 서부 전선으로 이동하 는 것을 저지하기 위해 거의 동시에 공격을 개시한다고 하는 스탈린 원수의 성명을 확인하였다. 5. 3국[미.영.소]의 참모가 앞으로도 유럽에 긴급한 여러 작전에 관해 서로 밀접한 접촉을 갖는다는 데에 동의하였다. 특히 이런 여러 작전에서 적을 혼란에 빠뜨리기 위한 위장 계획을 이에 관련된 참모 가 서로 협의하여 결정한다는 데 동의하였다. --테헤란 회담에서 체결된 <대(對)독 승리를 위한 군사 계획에 관한 협정>에서 ☞ 루스벨트와 처칠은 1943년 11월 카이로 회담 직후 이란의 수도인 테헤란으로 가서, 소련의 스탈린과 2차 세계 대전이 시작되고 난 후 처음으로 3자 회담을 가졌다. 그 회담에서는 ⑴ 전쟁 수행 결의에 관한 <삼국 선언>, ⑵ 이란 독립을 약속한 선언, 그리고 ⑶ 북프랑스 상륙 작전을 결정한 위 협정이 체결 되었다. 한편 이 때 유고슬라비아의 유격대를 이끌었던 사람이 바로 티토이다. ◑ 얄타 회담(1945.2) 소련, 미국, 영국의 3대국 지도자는, 독일이 항복하고 또 유럽에서 전쟁이 끝나고 나서 2∼3개월 뒤에, 소련이 다음의 조건으로 연합국 편에서 일본에 대한 전쟁에 참가하기로 협정하였다. 1. 외몽고[몽고 인민 공화국]의 현재 상태는 계속 유지되어야 한다. 2. 1904년 일본의 배신적 공격으로 침해된 러시아의 옛 권리는 다음과 같이 회복되어야 한다. ⒜ 사할린 남부 및 그 주변의 모든 섬은 소련에 반환된다. ⒝ 다롄항은 국제화되고, 이 항구에서 소련의 우선적 이익은 옹호된다. 소련의 해군 기지로서 뤼순 의 조차권은 회복된다. ⒞ 동청(東淸) 철도 및 다롄에서 출발하는 남만주 철도는 중·소 합병 회사의 설립에 따라 공동으 로 운영된다. 단 이것은 소련의 우선적 이익이 보장되고, 중국은 만주에 대해 완전한 주권을 갖 는다고 하는 이해를 바탕으로 하는 것이다. 3. 쿠릴 열도를 소련에 넘겨 준다. …… 3대국 수반은 소련의 이러한 요구를 일본의 패배 후에 확실히 들어 주기로 협정하였다. --얄타에서 맺어진 비밀 협정(1945.2.11))에서 ☞ 미국의 루스벨트, 영국의 처칠, 소련의 스탈린이 소련의 얄타에서 만나, 전쟁 후 독일의 처리, 국제 기구의 설립 등에 관해 의견의 일치를 보았다. 그리고 여기에서는 몇 개의 비밀 협정이 체결되었는데, 위는 그 중 하나이다. 이것은 제 2차 세계 대전이 끝난 후인 1946년 2월 11일 미국 국무성에 의해 발표되었다. 이 회담에 따라 1945년 8월에 소련이 대일전에 참전하였으며 동북 아시아에서 소련 공산주의 확장이 초래되었다. ◑ 포츠담 선언(1945.7.26.) 1. 우리들 합중국 대통령, 중화 민국 정부 수석 및 영국 수상은 우리 수억의 국민을 대표하여 협의한 결과, 일본에게 이번 전쟁을 종결할 기회를 주기로 의견 일치를 보았다. 3. 힘차게 일어선 세계 자유 국가 백성의 힘에 대한 독일의 쓸데없는 저항이 어떠한 결과를 가져왔는 가 하는 것은 일본 국민에게 좋은 본보기가 될 것임은 분명하다. 현재 일본을 향해 집결되고 있는 전력(戰力)은, 저항 중의 나치에 투하되어 독일 국민의 모든 토지·산업·생활 양식을 황폐화시킨 힘에 비해 비교가 안될 정도로 강하다. 우리의 결의를 바탕으로 우리 군사력을 최대한 사용하였을 때 일본 군대는 완전히 파멸하고 또 일본 국토는 완전히 파괴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4. 분별없는 판단으로 일본을 멸망으로 이끌어 간 거만한 군국주의적 조언자들이 일본을 계속 통치할 것인가, 아니면 일본이 합리적인 길을 밟을 것인가를 일본 스스로 결정할 시기가 왔다. 5. 우리의 조건은 아래와 같다. 우리는 아래의 조건에서 이탈하는 일이 없을 것이다. 이것을 대신하는 조건도 존재하지 않는다. 우 리는 더 이상의 지연을 인정할 수 없다. 6. 우리는 무책임한 군국주의가 세계로부터 축출될 때까지는 평화와 안전 및 정의의 새 질서가 생겨날 수 없음을 주장하는 것이므로, 일본 국민을 속여 이로 하여금 세계 정복이라는 큰 일에 나서는 잘못 을 저지르게 한 권력과 세력은 영원히 제거되지 않으면 안된다. 7. 위와 같은 새 질서가 수립되고, 일본의 전쟁 수행 능력이 깨져 버렸다는 것이 확실히 증명될 때까 지는, 연합국이 지정하는 일본 영토 안의 여러 지점은 우리들이 여기에서 지시하는 기본적 목적을 확실히 달성하기 위해 점령될 것이다. 8. 카이로 선언의 조항은 이행될 것이며, 일본의 주권은 혼슈·홋카이도·규슈·시코쿠 및 우리가 결 정하는 작은 섬들에 한정될 것이다. 13. 우리는 일본 정부가 곧 모든 일본 군대의 무조건 항복을 선언하고, 그런 행동에서 일본 정부가 성의(誠意)를 보이겠다는 충분한 보장을 하기를 일본 정부에 요구한다. 위와 같은 길 이외의 다른 선택은 신속하고도 완전한 파멸을 가져올 뿐이다. --포츠담 선언에서 ☞ 미국·영국·중국의 대표자가 베를린 교외의 포츠담에서 항복한 독일에 관한 전후 처리 문제와 대(對)일 문제를 의논하였는데, 여기에서 7월 26일 트루먼·처칠·장제스의 이름으로 된 위의 선언 이 발표되어 일본에 대한 전쟁 종결의 조건이 제시되었다. 일본에서 군국적 세력의 영구적 제거, 신 질서 건설까지 연합국의 일본 점령, 일본의 영토 범위 결정, 일본 군대의 완전 무장 해제, 전쟁 범 죄자 처벌, 민주주의의 부활 강화로 언론·종교·사상의 자유 및 기본적 인권의 확립 등을 규정하 였다. 소련은 1941년에 일본과 맺었던 중립 조약을 파기하고 1945년 8월 8일 대일 참전과 함께 이 선언에 참가하였으며, 일본은 8월 15일 마침내 이를 받아들였다. ◑ 뉘른베르크 군사 재판 : 독일의 주요 전쟁 범죄인에 대한 처분은 1945년 8월 미국·영국·프랑스·소련의 4개국 사이에서 체 결됐던『유럽 추축국 주요 전쟁 범죄인의 소추 및 처벌에 관한 협정』과『동(同) 부속 국제 군사 재판소 조례』로 구체화했다. 11월 20일 세계가 주목하는 가운데 뉘른베르크(Numberg)에서 주요 전범 24명에 대한 재판을 시작해 이듬해인 1946년 10월 1일에 판결을 내렸다. 처벌 대상은 이전까지의 단순한 ① 교전 법규 위반 죄(고유한 의미의 전쟁 범죄)에 머무르지 않고, ② 평화에 대한 죄(침략 전쟁을 시작한 책임), ③ 비인도적 행위에 대한 책임을 묻는 죄를 새롭게 포함했다. ②가 가장 중요한 법규였던 도쿄 재판에 비해 뉘른베르크 군사 재판소에서는 ①과 ③이 중요한 내용이 됐다. 법정에 선 나치당의 수뇌부 들이었던 피고들은 오랜 심리에 굴복했다. 그런데 오만한 태도를 견지하고 응답해‘굴복한 야수들’이라고 일컬어지기도 했다(교수형 : 보어만을 포함한 12명, 종신형 : 헤스를 포함한 3명, 금고 20년 : 2명, 금고 15년 : 1명, 금고 10년 : 1명, 무죄 : 3명, 그 밖에 2명은 수감 중 자살). ◑ 극동 군사 재판(도쿄 재판) : 연합국은, 서방에서는 1945년 11월 뉘른베르크에서, 동쪽에서는 1946년 5월 도쿄에서 군사 재판을 시작했다. 이 재판은 전승국이 패전국을 재판하는 것으로, 이후 비인도적 전쟁의 방지에도 목적이 있었다. 도쿄에서 열린 극동 군사 재판은 연합국 최고 사령관으로서 일본을 점령한 맥아더 원수의 명령으로 진행되어 일본의 A급 전쟁 범죄인으로 도조(東條) 전 총리 이하 28명이 재판을 받고 유죄가 선고됐다. 그 밖에 B급 C급 전범으로 전쟁중 비인도적 잔학 행위를 한 약 5천명이 재판을 받았다. |
내용출처 : [기타] www.yumkwang-gie.hs/k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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