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차 세계 대전의 명기들 part Ⅱ
태평양 전쟁편(미국과 일본)
편집부 문영훈
B-29 에놀라 게이(Enola Gay)호는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고 고도 약 9,500m으로 히로시마에 접근했다. 일본에는 고공으로 비행해 오는 불과 몇 대의 적기에 맞서 출격할 만한 전투기가 없었다. 8시 15분 17초, 폭탄이 비행기에서 떨어졌다. 8시 16분 눈을 보호하기 위해 특수한 방안경을 쓰고 있던 공격기의 승무원들은 진홍색의 섬광을 보았다. "오 하느님, 우리가 지금 무슨 일을 저질렀나이까?"
...20세기 대 사건들 중에서
들어가며...
1941년 12월 7일 오전 7시 50분 누구도 상상할 수 없었던 기습공격이 일본 함재기들로 부터 시작되고, 2차례의 공격으로 인해 미국의 태평양 함대는 거의 모든 공격력을 상실하고 만다. 2시간 남짓한 이 공격으로 인해 일본과 미국은 돌이킬 수 없는 전쟁의 기나긴 터널 속으로 들어가게 된다. 이 전쟁을 통해 인류는 무한한 진보를 경험하게 된다. 최초의 왕복엔진으로부터 제트엔진으로의 진보, 전편에서 언급했지만, 연을 날리던 초기의 탐험정신에서 살상용 무기로의 전환 등의 여러 가지들을 말이다. 하지만 그렇게 단편적인 기술향상의 피상적인 것만으로 전쟁을 평가해서는 안될 것이다. 전쟁의 평가는 언제까지나 형평성에 따라야 한다. 누구에게도 책임을 지우거나 회피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인간의 욕망과 그 한계에 대해서는 모두가 입을 모아 끝이 없다고 한다. 이번에 이 기사를 준비하면서 절실히 느꼈던 사실도 마찬가지로 끝없는 국수주의적 팽창주의를 신봉하는 제국주의 국가들의 가멸 찬 야욕들이 2,700만 명이라는 어마어마한 사상자를 낳고 말았다는 것을 보았을 때 인간의 마지막 전쟁일지도 모르는 3차 대전에서는 어떠한 결과를 낳을 것인가를 생각해 보면 아찔해지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전쟁의 결과는 또한 아이러니한 기술의 진보를 가지고 오는데 그중 하나는 전 편에서 언급했듯이 초고속 항공기의 출현을 예고한 첫 제트(Jet)엔진 항공기 Me262의 등장이며 다른 하나는 태평양 무대에서의 원자폭탄의 등장이 바로 그것이다. 이로써 인류는 순식간에 핵 공포의 소용돌이 속으로 들어가게 되며, 돌이킬 수 없는 인류의 멸망의 길로 접어들게 된 것이다.
태평양의 사무라이들
세계 2차대전의 시기를 어디에 맞추느냐는 여러 설이 있지만, 유럽과 태평양 지역을 나누었을 때 일본의 경우 독일의 폴란드 침공보다 2년이나 앞선 1937년에 중일전쟁으로 이미 시작되었고, 이를 2차대전의 시발로 보는 것이 정설이다. 1937년 7월 7일 일본은 소위 지나 사변을 계기로 중일전쟁을 일으켰다. 이미 일본은 근대화한 무기를 지닌 30만의 정규군과 타민족으로 구성된 예비군을 보유했으며, 당시 세계 수위의 자리를 굳혔던 강력한 해군 함대와 해군항공기들만으로 나무 권총의 중국 장개석 군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였다. 그러나 상황은 알 수 없는 법. 이러한 화력과 인력으로 손쉽게 항복을 얻으리라는 일본의 계산은 많은 오차를 가지고 오게 한다. 2년 안에 붉은 곰을 무릎 꿇게 하겠다는 사무라이들의 야망은 끈질긴 중국의 저항과 미국의 원조로 대전 말까지 지속되는 장기전으로 좌절되게 된다. 이러한 일본의 야욕은 소위 그들의 '대동아 공영권'(The Greater East Asia Co-Prosperity Sphere)이라는 망상으로 거듭나게 된다. 이것이 바로 일본이 세계대전에 발을 들여놓게 되는 원인이 되었다. 1941년 미국은 이러한 일본의 팽창을 억제하고자 대 일본 경제 봉쇄정책과 어울러 중국, 네덜란드, 영국 등을 위시로 한 마지노선을 구축했다. 상황이 이렇게까지 미치자 일본은 전쟁 무기 생산 원료인 고무, 석유, 주석의 확보가 어려워 그들에게 있어 커다란 선택의 기로에 서게 된다. 전쟁 야욕을 포기하느냐, 아니면 태평양을 교두보로 전쟁 물자를 확보하느냐 하는 근본적인 문제에 봉착하게 되는 것이다. 이에 일본은 미국에 대한 교섭을 계속하며, 전쟁 준비에 총력을 기울이는 야심에 찬 계획을 세우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진주만의 기습 공격 작전이다. 1939년 독일이 폴란드를 침공하여 전 유럽을 전격전으로 유린하고 1941년에는 소련까지 독일의 공세에 밀려 이미 전세는 독일로 기운 상태였다. 이러한 유럽의 상황은 미국과 중국에게 철저한 봉쇄로 시달리던 일본에게는 여름 가뭄을 해소하는 시원한 소나기가 아닐 수 없었다. 영국과 모든 연합군 세력들 그리고 세계의 이목이 모두 유럽으로 몰렸을 때를 이용하여 미국이라는 호랑이를 잡으러 진주만(Pearl harbor)으로 가게 된다.
치욕 속에 기억될 날
12월 7일 일요일 오전 7시 50분 하와이의 오하우섬 일대의 상공은 183대의 일본 급강하 폭격기와 뇌격기, 전투기 등의 항공기로 가득 메워졌다. 평화로운 휴일 오전의 진주만은 그야말로 무방비 상태였다. 당시 육해군 사령관의 쇼오트(Short)장군과 킴멜(Kimmel)제독은 상호간의 지휘가 통일되지 않고, 각각 분리된 상태에서 서로 상대 군의 병력을 과신하고, 경계라든가 방어 태세를 제대로 하지 않았었다. 1차의 공격으로 인하여 진주만에 정박중인 전함들과 힉캄(Hicham), 휠러(Wheeler)등 4군데 이상의 비행장이 그야말로 쑥대밭이 되어 버렸다. 75분뒤 167대의 함재기의 2차공격이 감행되었다. 작전 완료 시각 09시45분. 2시간 남짓의 공격으로 태평양 함대의 전투력은 사실상 제로로 떨어지게 된다. 전함 7척을 포함한 18척의 순양함 구축함 등의 함선 등이 격침 또는 대파되었고, 항공기 역시 347대가 대파, 파손되었다. 사상자 또한 만만치 않았다. 육해공군 전사자 2,403명을 포함하여 총 3,581명이 목숨을 잃었으며, 1,178명이 부상을 당했다. 그러나 일본의 진주만 기습은 단기간의 공습으로 최대의 효과를 얻었던 반면에 미국의 전쟁 의지를 북돋웠던 커다란 계기가 되어버렸다. 당시 미국의 여론은 소극적이며, 반전운동이 확산되어 있던 상황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선전포고 없이 감행된 일본의 만행으로 전 미국은 분개하여 일어났고, 전 역량을 전쟁에 집중시킬 수 있게 되었다. 12월 7일 미국의 대통령 루즈벨트가 그의 긴급 성명서에서 '치욕 속에 기억될 날'이라 언급하고, 미 의회는 일본에 대해 선전 포고를 하였다. 드디어 태평양의 제 2차 세계대전이 시작된 것이다. 여기서 잠시 숨을 돌려 일본과 미국의 기종들을 사려보기로 하겠다. 사실 전투기로써는 일본의 간판급 스타인 제로센을 빼놓을 수 가 없을 것이다. 다음으로 나카지마의 유작품인 하야부사를 소개하겠고, 미국의 전투기로서는 2차 대전 하늘의 왕자였던 P-51 무스탕과 P-38 라이트닝을 선택하였다. 나름대로 태평양전쟁의 유명 인사들을 추천했으나, 단지 기능과 기종의 특징만으로 나눈다는 게 쉽지 않다는 것을 독자들도 이해하기 바란다. 폭격기로는 말레이야(Malaya)전에서 커다란 타격을 입혔던 G3M과 Ki-21을 들고, 장거리 폭격기의 대부라 불리었던 B-17과 B-29를 선정했다.
일본의 자존심
A6M 제로 전투기
스핏파이어, 메샤슈미트와 P-51 무스탕 이 세 기종들을 서양의 40년대 최대의 집적 기술이라면 항공사에 뒤늦게 이름이 오른 일본은 절대로 이에 귀지지 않는다고 볼 수 있다. 전쟁의 전 기간동안 일본은 생산에 있어서 독특함을 지녔다. 그것은 말할 것도 없이 태평양의 무대를 휘저었던 미쓰비시사의 A6M(비공식적 연합국 측 이름으로 제로(Zero)와 제케(Zeke)라는 이름을 가진)이다. 이 기종은 모든 전장과 임무 지역에서 많은 수가 선보였고 적기에 대한 그들의 확실한 우수성을 가지고 전쟁 말기에 막대한 영향을 끼쳤다. A6M 시리즈는 일본의 전투력의 상징이 되어 버렸고, 주 기종들은 일본의 확장 전략을 수행하는데 부족함이 없었다. 비록 1942년 중반부터 공중의 힘의 균형은 점차적으로 연합국 측으로 기울어 가진 때까지도 제로는 끊임없는 임무 수행을 계속했으며, 생산라인에서는 1939년 3월부터 45년 8월까지 많은 개량형과 더불어 10,499대를 생산 일본에서 전투기 생산량의 최대의 기록을 세우기도 했다. 일본 제국 해군의 설계 요구는 당시 대형 항공사였던 미쓰비시(Mitsubishi)와 나까지마(Nakajima)에 1937년 5월에 제출되었다. 처음에는 두 공장 다 긍정적인 입장을 취했으나 끝내는 미쓰비시만이 남게 되었는데, 그 이유는 군 당국에서 그들의 원 요구 안을 중국에서 얻은 전투 경험을 토대로 대폭 수정케 되었다. 개선된 요구 안은 나까지마의 기술자들로서는 얻을 수 없는 까다로운 제안이었고, 그들은 그 계획을 그만 포기하게 된 것이다. 그 요구사항으로는 최대 스피드 500Km/h (311mph)와 3000m 고도의 상승시간이 9.5분이었으며, 최대 항속 거리가 경제 순항 속도로 보조 탱크를 장착했을 때엔 8시간의 비행이 가능하며, 전투 모드 시에는 2시간의 비행시간을 가져야 했다. 또한 제한된 구역 내에서 예를 들어 함상에서의 이륙이 가능하도록 하는 성능을 들 수 있다. 전선에 배치된 A5M을 대체하기 위해 기동성 또한 좋아야 했으며, 무장으로는 7.7mm, 20mm 기관총을 각각 2정을 싣고, 60kg의 폭탄을 실을 수 있어야 하는 비행기라야만 하는 당시로서는 굉장히 까다로운 요구 안이었다. 미스비시의 설계장인 지로 호리코시는 이러한 요구 안에 포기하지 않고, 놀라운 연구 노력과 실험 등을 통해 그의 걸작품을 얻을 수 있었다. 원 요구서가 나오게 된 이래로 1939년 3월 1일 히로코시의 첫 작품이 하늘에 선을 보이게 되었으며 이 기종은 A6M으로 단순히 요구 안만을 수행한 것이 아닌 그것들을 능가해 버렸다. 그의 성공에 힘입어 히로코시는 그의 세 번째 시작기에 더욱 더 강력한 엔진을 장착하여, A6M2를 39년 12월 28일에 시험 비행하므로 해군에 커다란 인상을 안겨 주었으며, 제로기는 대량생산에 들어가게 되었다. 첫 번째 A6M2기들은 1940년 6월 임무 수행했으며, 두 달 뒤에는 중국에서의 첫 출전을 하였다. 일본의 전쟁 참가시 제로기들은 해상 모함들의 선봉대가 되어 진주만으로부터 미드웨이전인 1941년 6월까지 명백한 영공의 우수성을 나타내는 왕자의 자리를 굳혔다. 이러한 역사적 전투 후에 획기적인 전환점들이 연합국 측의 막대한 손실과 격추된 비행기와 조종사들을 대체해야 할 어려움뿐만 아니라 그들 적국의 점진적인 회복과 새롭고 막강한 연합국 항공기의 출현에 의해 생겨났다. 제로의 두 번째 모델인 A6M3이 더욱더 향상된 엔진과 무장을 장착하고서 전선에 배치된 것은 미드웨이 해전이 시작되던 바로 그 해였다. 전세가 불리함에 몰리자 일본 기술자들은 제로기의 기능 향상에 막대한 노력을 기울여 1943년 가을에 마침내 A6M5 모델을 제작 전선에 배치시켰다. 아마도 제로 시리즈 중에서 미국의 헬켓(Hellcat)과 콜세어(Corsair)에 대항키 위해 제작된 무장과 동력 면에서 가장 효율적인 비행기였다. 그러나, A6M5가 동등한 조건에서 그들과 전투를 벌이지 못해서 예를 들어 유능한 조종사의 부족 등으로 전세는 연합군 측으로 기울어 졌다. 1945년 마지막 시도기인 제로의 마지막 모델인 1560hp 엔진을 장착한 A6M8은 A6M2보다 추력면에서 60%이상의 향상을 가져왔다. 시작기는 4월에 나왔지만 계속되는 전세의 악화와 일본 산업의 혼란한 상태는 이러한 거대한 대량생산 계획을 가로막아 6,300대의 제작만이 이루어졌다.
Ki-43 하야부사
연합국 암호명으로 오스카(oscar)로 더욱 잘 알려진 나카지마 Ki-43 하야부사는 전쟁의 초기에서부터 말기까지 전선에 배치되었으며, 일본 육군의 근대전투기였다. 이는 태평양의 전쟁발발시 연합국 측의 불유쾌한 기습을 안겨주었던 이 빠르고 매우 민첩한 하야부사는 전쟁말기 자살임무(가미가제)를 끝으로 그 임무를 마쳤다. 접합한 임무는 아니었지만, 일본 본토 공습 당시에 미 폭격기 요격임무를 맡기도 하였다. Ki-43의 탄생을 유도한 설계명세서들은 1937년 육군에 의해 제시되었으며 처음으로 많은 제작사들의 공개경쟁을 실시하여 교체대상인 Ki-27이 먼저 생산되고 있었던 나카지마가 그 사업을 인수하였다. 히데오 이토카와를 중심으로 디자인이 제작되어 정확히 1년 후 첫 시작기가 비행을 하여 1939년 1월 1일부터 오랜 장시간의 시험비행과 후속 시험 비행기들을 제작하여 1940년까지 그 비행과 시험이 계속되었다. 716대가 생산된 초기모델은 Ki-43-I 와 Ki-43-IB였으며 두 기종간의 차이점은 오직 무장에 의한 것뿐이다. 1942년에 생산된 매우 향상된 모델은 Ki-43-Ⅱ는 결국 이 기종의 생산에 많은 부분을 차지하게 되었다. 주요 차이점은 (전 기종들과 비교해 볼 때) 세 개의 블레이드를 가진 효율 좋은 엔진과 Ki-43-I의 단방향 블레이드 프로펠러 대신에 피치 가능한 프로펠러가 있다. 항공역학 상의 개선이 행해졌으며 처음으로 조종사를 위한 장갑판과 초기 자동 밀폐식 연료탱크가 도입되었다. Ki-43-Ⅱ a, b, KIA의 세 가지 모델이 제작되었다. 발전단계 중에 채택된 수정개조로 모든 변형이 도입되었다. 1944년 생산된 마지막 모델은 Ki-43-Ⅲ이며 전쟁말기까지 생산되었다. 1250hp 엔진을 장착 -가장 작은 수로 생산되었지만- 의심의 여지없이 전체시리즈 중 가장 최고였다고 할 수 있다. Ki-43은 숫자적으로 일본 육군 항공대의 가장 중요한 전투기였으며 일본의 전투지역에서는 어느 전선이라도 눈부신 활약을 했다. 비록 연합군 전투기에 대한 우세함은 오래 못 갔지만 하야부사는 말라야(Malaya), 자바(Java), 수마트라(Sumatra)에서의 구식 연합군 비행기에 대하여 무적의 영광을 잠시 가지기도 했다. 당시 미국 전투기에 비교해 볼 때 이 기종의 가장 큰 특징은 기동성이었다.
P-38 라이트닝(Lightening)
P-38은 끊임없는 개선으로 다량의 개량형으로 개발된 기종으로 미국의 전 전투지역에서 저고도와 고도에서 운용되는 전투기로써 또한 전투 호위기로써 폭격기와 사진 정찰기로써 폭넓게 사용되었던 기종이다. 시제기는 1936년 육군항공대의 요구를 만족시키기 위해 록히드에서 제작되었다. 처음 개발 당시 미육군항공대의 설계요구 조건은 고도 6100m에서 580km/h의 속도와 해면 고도속도 467km/h를 낼 수 있었고 요격 가능한 적정고도에 6분 이내에 도달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많은 항공제작사 들이 이 계획에 도전했지만 모두 실패했다. 그러나 록히드사(Lockheed)의 켈리존슨(Kelly Johnson)이 이끄는 개발 팀은 결국 육군의 요구에 합격할 수 있는 쌍발 전투기를 제작하게 된다. 시제기 XP-38은 1939년 1월 첫 비행을 하였으며 41년 3월 미 공군에 인도되었다. P-38D는 라이트닝중 전쟁에 참가한 첫 개량형으로 독일에 선전포고를 한 몇분뒤 아일랜드 상공에서 적기를 격추시킨 첫 항공기로 알려져 있다. P-38L형은 태평양전쟁시 마지막까지 전투에 참가했던 마지막기종으로 알려져 있다. 일례로 폭격기 호위임무로 일본의 무조건 항복당시에 일본본토에 착륙했던 첫 전투기로 그 의미가 깊다. 전쟁을 통해 대량 생산된 라이트닝은 18개의 개량형을 가진다. 그러나 영국공군은 이미 생산에 들어간 P-38이 영국환경에 적합하지 못한 성능으로 인해 P-38D와 비슷한 143대중 3개의 변형기를 도입했다. 미국에서 운용되는 P-38D형은 자동밀폐식 연료탱크와 난기류에 의한 버페팅(buffeting)을 맡기 위한 꼬리날개의 개조로 원형과 많이 다르다. P-38E형은 무장의 변화를 가져왔고 F형은 더욱 강력한 엔진과 저익의 기체로 연료탱크 혹은 무기장착이 가능했다. G형 또한 고출력의 엔진을 장착했고 J형은 개선된 냉각시스템과 에일러론을 들 수 있다. L형은 가장 많이 생산된 기종으로 총 생산대수 9923대중 2923대에 달한다. 이 기종의 특징은 로켓탄을 발사할 수 있는 발사대를 날개에 장착했다는 점이다. 라이트닝은 특히 독일 상공 깊숙이 침투하여 포격했던 영국공군 폭격기의 장거리 호위기 뿐만 아니라 장거리 요격기로 유명하다. 일례로 일본 태평양 함대 사령관 야마모도가 탄 G4M1을 격추시킨 전설을 가진다. 1940년부터 1945년까지 생산된 P-38은 모두 9923대가 생산되었다.
P-51 무스탕(Mustang)
독자들은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의 태양의 제국을 기억할 것이다. 꼬마 주인공이 활주로의 한 건물 옥상 위로 올라가 'P-51 하늘의 캐딜락'이라며 외치던 장면 말이다. 2차 세계대전중 최고의 전투기라 불렸던 이 기종의 등장은 2차 대전의 후반부터 그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이는 당시의 시대를 크게 앞선 두가지 기술의 산실로서 하나는 미국 항공 산업이 이룩해 낸 117일간의 결정체인 항공역학적 설계의 기체이고 다른 하나는 영국 자동차 산업이 일궈낸 롤스로이스 메를린 엔진의 기술이다. 사실 무스탕에서 영국의 메를린 엔진을 장착하지 못했다면 그 결과는 예측할 수 없이 형편없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P-51의 탄생을 가져오게 된 계획은 영국과 미국의 합작 정신의 초기때부터로 거슬러 올라간다. 1940년 미국에 도착한 영국 군수 위원회(R.P.C)는 노스 아메리칸(North American)사와의 오랜 협상 끝에 120일안에 영국이 원하는 기종을 내놓도록 합의한다. 이리하여 레이몬드 라이스(Raymond Rice)와 에드거 슈무트(Edgar Schmued)는 그들의 시제기인 NA-73X를 영국이 제시한 120일을 꽉 채운 117일만에 완성시켰다. 그 첫 비행은 1940년 10월 26일에 실시되었고, P-40보다 40km/h(25mph)나 빠른 속도와 다른 여러 가지 면에서 우수함을 보여주었다. 320대의 항공기 계약이 미국정부에 의해 진행되는 동안 2대의 항공기가 미 육군 항공대(USAAC)에 인도되어 비행 테스트를 가졌다. 첫 생산기는 1941년 5월 1일 노스 아메리칸에 인도되어 비행테스트기를 가졌다. 두 번째 생산기는 11월에 영국에 도착하여 무스탕 MkⅠ라는 공식 명칭을 받았다. 이 기종은 41년 4월 전선에 비치되었고, 전술 정찰기로도 사용되었다. 무스탕의 저고도 속도 628km/h(390mph)는 타 영국 공군의 전투기 속도에 비해 상당히 빠른 것이었다. 그러나 저고도용 엔진으로 인해 공급된 620기가 지상군 지원과 사진 촬영, 정찰 업무로 외에는 사용할 수 없게 되는 원인이 되었다. MkⅠ A는 4문의 20mm기관포를 장비했고, MkⅡ는 500lb의 폭탄을 적재했다. 1942년에 이르러 미 공군은 이 기종의 특성화의 필요성을 깨달았고 많은 물량을 주문하였다. 그 시작이 P-51(기관포 4문), A-36A(급강하 폭격기)와 F-6A(근접 정찰기)이다. 이는 310대의 P-51A의 주문에 이은 것으로 1943년 봄에 인도되기 시작했다. 무스탕은 마침 그의 이상적인 구성을 갖지 못했었다. 이러한 생각은 영국 기술자와 그들의 대서양 동료들에 동시에 전달되었다. 영국에서는 4대의 무스탕이 롤스로이스에 인도되어 메를린 61엔진을 시험하였고, 또한 미국에서는 두 대가 인도되어 팩커드(Packard)사에서 라이센스 생산 중인던 V-6150-3 엔진을 가지고 똑같은 시험을 실시하였다. 이는 고고도에서 고출력을 낼수 있는 터보 차져 기능이 있는 고고도용 엔진이었음을 상기해 볼 필요가 있다. 1942년 9월 이 엔진을 장착한 첫시제기가 탄생하였으니, 이것이 바로 P-51B이다. 이 기종의 성능 특성을 보면 고도 9145m(30,000ft)에서 708km/h(439mph)의 속력과 고도 상승시간 5분 54초를 들 수 있다. 이는 전 P-51A의 628km/h(390mph)의 속도와 같은 고도상승시에 9분 이상 걸리는 성능에 비하여 놀라운 발전이었다. 이 항공기는 1943년 여름 즉시 대량생산으로 들어가 잉글우드에서 1,988대의 P-51B를 생산하였고, 달라스의 새 공장에서는 1,750대의 P-51C를 생산하였다. 1,000대의 P-51을 인수한 영국은 이 기종을 무스탕 MkⅢ라 칭하고, P-51B형은 1943년 12월 1일 잉글랜드 주둔의 미국 제8비행단에 배치시켰다. 1944년 봄 전쟁 중 가장 많은 생산 대수를 가진 P-51D가 등장하였다. 영국 공군(RAF) 시험에 기초로 하여 무스탕 MkⅢ의 전투기의 필수적인 조종석 시야를 더 많이 확보하기 위해 프레임 없는 유선형의 캐노피를 장착하였다. 이에 노스 아메리칸에서는 즉시 이 문제에 착수하여, P-51D형에서는 칵핏의 뒷부분의 유선형 부분을 제거하고, 측면 표피의 감소를 보완하기 위해 돌출부를 첨가했으며, 조종석은 투명한 유선형 덮개로 완전히 덮었다. 7,956대의 D형이 제작되었으며, 1,760hp의 출력과 703km/h(437mph)의 속도를 자랑했다. 마지막 기종인 P-51H은 일본에 대한 마지막 임무 수행에 참가하기 위해 완성되었으며, 총 555대가 생산되었고, P-51기종 중 가장 빠른 속력을(784km/h,487mph) 지닌 기종이었다. 임무 수행 면에서의 무스탕의 성능은 2차 세계대전 중 모든 전선에서 활약한 충실한 전투기 임무를 훨씬 넘어선 다목적 항공기였다. 한국전쟁에 투입되어 창공의 조인으로서 활약을 했던 P-51 무스탕은 총 15,686대가 생산되었다.
뒤바뀐 태평양의 주인
진주만 기습 당시 미국의 가장 큰 희망은 모든 미 항모의 진주만 부재였으며, 선박 수리소와 450만 배럴의 막대한 유류 저장고가 그것이었다. 이는 진주만의 재빠른 복구를 가능케 하였으며, 이는 미국의 태평양 진출이 머지 않았음을 암시한다. 진주만 기습으로 시간을 벌게된 일본은 조금씩 그들의 '대동아침략전'을 실시하게 된다. 진주만 기습과 동일한 12월 7일 개시된 말라야(Malaya)전투에서 일본은 영국의 프린스 오브 웨일즈(Prince of Wales)와 레펄스(Repulse)를 격침시켰다. 일본 해군 항공대의 쌍발 뇌격기는 호위기 없이 프랑스령 인도차이나를 이륙 최대 항속거리로 날아가 웨일즈와 레펄스의 최후를 지켜보았던 것이다. 이는 오로지 항공기에 의해 격침된 최초의 현대식 주력함이며, 그 역사적 의의도 또한 깊다. 그만큼 항공 방어력이 없는 함대의 무력함을 보여주는 것이다. 계속된 일본의 공중 공격과 침투로 수마트라와 자바, 싱가포르, 보르네오, 동인도 등은 일본의 수중에 들어가게 된다. 끝까지 버티던 미얀마마저 3월말 점령당하게 되므로, 진주만에서 승전고를 울렸던 일본 항공모함들은 또한번 무적함대로 자리를 굳혀 나간다. 또한 이들은 4월 초 인도양에 투입되어 실론섬의 콜롬보와 트린코말리를 공격하므로 영국 동부 함대와 접전을 벌이게 된다. 여기서 영국 전투기들은 일본 함재기와의 조우에서 적은 손실을 입고 끝났으나, 영국의 경 항공모함 헤르메스(Hermes)가 침몰하는 비운을 겪는다. 이는 항공모함이 함재기에 의해 침몰한 첫 희생물이며 일본측의 분위기는 그야말로 잔치분위기 그 자체였다. 1942년 5월 일본의 공격은 최고조에 이르러 뉴기니아 북쪽에 진지를 구축하고 섬의 남동부 해안에 더많은 지역을 확보하기 위해 항모 또한 산호(Coral)해안에 배치하였다. 그 지역의 항모는 사실상 먼저 와있던 일본과 대항해 전적으로 항공기만의 해상 공중전이 벌어졌다. 사실상 무승부로 끝이 났으나, 렉싱턴과 쇼호 각각 한척씩의 항모를 잃었고, 두 번째 항모는 심하게 파괴었다. 그러나 이 전투로 말미암아 일본 함대는 철수해야 했고, 이로써 남동부 뉴기니아는 오스트리아와 키티호크 전투기의 활약에 힘입어 되찾게 되었다. 진주만을 기습하며 맹위를 떨치던 사무라이들의 칼이 이제 무뎌진 것이다.
미드웨이 해전
진주만의 기습을 주도했던 일본의 연합 함대 사령관 야마모도는 또 다시 커다란 모험을 계획한다. 산호(Coral) 해전에서 연합군의 만만치 않은 반격을 받은 그로서는 남부 지역의 공략에서 동부 지역의로의 방향전환을 하게 된다. 만약 일본이 이번 작전에서 미드웨이를 얻는다면 유리한 조건하에서 미 태평양 함대를 유인 전 후에 승리를 거머쥐고서 협상에 의한 종전도 가능한 것이라고 본 것이다. 그리하여 야마모도는 전후 처음으로 일본의 전 해군력을 총 집결시켰다. 그 규모는 가히 세계 최대라 할 만하였다 항모5척, 전함11척, 순양함 14척, 구축함 58척, 점수함 17척과 그 밖의 수십 척의 함선이 그 구성원이었다. 그러나 승리의 여신은 미드웨이에 있지 않았다. 일본의 암호 해독기를 입수한 미국은 야마모도의 계획을 사전에 간파하고서 항모 엔터프라이즈(Enterprise) 호넷(Hornet), 요오크타운(Yorktown)과 순양함 8척, 구축함 14척, 잠수함25척츨 도원하였다. 항공력은 함재기 225대와 미드웨이 기지에 증강된 130대의 육상 항공기가 만반의 준비 태셍에 들어갔다. 진주만의 신중함을 보였던 야마모도 대 함대는 연전연승의 분위기에 사전 탐색과 정찰을 경시한 채 미드웨이로 향했다. 일본 대 함대는 1942년 6월 4일 06시 30분 드디어 미드웨이 서쪽 수백 마일 밖까지 도달하였다. 공격은 늘 그렇듯이 1,2차의 공격으로 나뉘어 감행되었다. 1차 공격이 별 신통치 않자 2차 공격 시에는 모든 함재기에 폭탄을 탑재하고, 미드웨이 폭격에 나서게 된다. 그러나 갑판을 떠날 즈음 정찰기가 미 항모의 출현을 밝혔고, 이에 항모의 뇌격을 위해 다시 함재기에 어뢰를 장착하게 된다. 2시간 가량의 장착 전환 후에 홀연히 나타난 미 뇌격기들...더글라스사의 디베스테이터(Devastator)뇌격기는 저 고도 비행으로 뇌격에 임했고, 이들은 적 전투기와 함대의 방공포에 대파 되었다. 모든 방어 무기가 해상 가까이의 저고도 비행하는 뇌격기에 집중됨에 따라 더글라스의 SBD 던틀리스(Dauntless) 급강하 폭격기는 그름 사이에서 나타나 대책 없는 항모에 수직으로 내려가 갑판위의 함재기의 폭탄, 그리고 어뢰까지 무차별 폭격하였다. 하루만에 끝이 나 버린 이 공중전과 해전에서 일본은 진주만의 용맹을 떨쳤던 아까기, 카가, 소류, 히류등 네 대의 항모를 잃었다. 미국 또한 항모 요오크타운을 잃었지만 어디기지나 미드웨이은 연합국측의 승리로 돌아갔다. 이로서 야마모도가 계획한 전쟁의 조기 종전의 계획은 수포로 돌아가게 되었고, 그의 태평양 함대의 공격력을 상실, 무뎌진 칼 마져 잃게 된 상황이 되어 버렸다.
ki-21 육군 폭격기
만약 G3M과 G4M이 일본 해군의 전형적 폭격기라 한다며 미쓰비시사의 KI-21은 육군 항공대의 그것과 동등하다고 할 수 있다. 연합국 측에게 샐리(Sally)라 불리는 KI-21은 상대 국에 비해 많은 열세함에도 불구하고 전쟁의 초기에서 말기까지 전선에 배치되었다. 5가지 하부 기종들로 나누어서 생산되어 총2064대가 생산되었다. 시작기는 1936년 12월 18일 첫 시험비행을 가졌으며 이는 일련의 시험비행은 두 종류의 기종을 중심으로 1년 넘게 가졌다. 첫 생산기인 KI-21LA는 1937년 12월에 생산되어 120대의 KI-21LB와 160대의 KI-21LC형이 강화된 방어 무장 체계와 늘어난 연료량을 특징으로 생산되었다. 40년 12월 KI-21LLB는 엔진과 강착 장치이 주된 개조를 토대로 590대가 생산되었으며 688대의 KI-21LLB가 채택 생산에 들어갔다. 연합국 측에 샐리라 알려진 KI-21은 가장 중요한 일본의 육군 폭격기였으며 그 제작 기간은 1938년부터 1944년이다. 8대의 첫 시제기와 실험기는 S36년 12월 18일에
비행하였다. 이 기종은 육군 97형 중폭격기로서 38년에 제작되어 총 2064대가 생산되었다. 생산형 I는 3개의 7.7mm기관총을 방어 무기로 채택하고, 850마력의 나카지마 ha-5 KAI 성형 엔진을 장착했다. 이 기종의 좋은 성능에도 불구 하고, 1937년 있었던 중일 전쟁에서 중국의 반격에 다소 큰 손실을 입었다. 그리하여 꼬리 부분에 스팅거 기총과 베어 건(bear gun)을 장착하여 부수적 무장을 더 했다. 1941년 12월 진주만 당시 1450마력의 미쓰비시 ha-1의 성형 엔진을 장착한 생산형II가 대부분의 폭격대에 배치되었다. 이 엔진의 커다란 덮게는 랜딩기어를 충분히 집어넣을 수 있도록 하였다. Ki-21IIb형은 데형의 12.7mm I형 기관총을 장착했다. 기종으로 1000kg(2205lb)폭탄 장착 능력을 가졌다. Ki-21은 일본 육군이 배치된 곳이며 어느 전장 이나마다 않고 , 임무 수행을 했다. 많은 수가 수공기로 전환하여 MC-21로 다시 명명되어 사용되었다.
G3M 해군 96식 폭격기
중국과의 전쟁에서 강화된 일본의 공군은 전쟁력을 준비하는데 심혈을 기울였으며, 특히 폭격부분에서 두각을 드러냈다. 일본의 해군과 육군 둘다 당시 연합군의 항공기들 보다 대부분 성능이 나았으며 태평양 전쟁 초기의 승리는 이에 준하는 것이었다. 중국과의 전쟁은 일본에게 탄탄한 전쟁 경험의 바탕을 안겨 주었다. 이를 주도했던 기종 중 하나가 바로 1937년 8월에 첫 선을 보인 미쓰비시 G3M으로 일본의 해군 항공대의 중추적 역할을 해낸 기종이다. 이소루쿠 야마모토 장군은 이 쌍발 엔진 기종의 개발을 착수하는데 힘쓴 사람 중의 하나이며 해군의 지원을 위해 사용될 장거리 육상용 폭격기 생산의 필요성을 해군 장성들에게 확신시키려 노력했다. 1934년 4월에 시작기가 제작 다음해인 35년 6월 21대의 선제기가 폭격임무를 위해 개발되었고, 시험비행을 마쳤다, 이리하여 G3M1의 첫 생산기가 36년 6월에 나오게 되었다. 첫번째 시제기는 1935년 7월 2개의 447kw급 히로 91형 성형 엔진을 장착하고 시범 비행을 했다. 이후에 좋은 결과를 얻은 미쓰비시 측은 곧바로 615kw (825마력급) 긴세이 3 엔진을 장착하고서 G3M1의 생산에 들어가게 된다. 34대의 초기기종이 생산된 후 공장에서는 G3M의 주모델이 되어 버린 G3M2형을 742.5kw (1,000hp)급 킨세이 42 혹은 45엔진을 장착하고서 G3M2-21와 22이라는 이름으로 각각 343대와 400대씩을 생산하였다. 41년 12월 10일에 있었던 말레이야 해전에서 HMS 레펄스와 프린스 오브 웨일즈를 격침시킨 장본 인중 하나가 바로 이 기종이다. 비록 이 전쟁 기록이 일본 해군 96식 뇌격기인 G3M이 대전사에서 전해지는 유명한 기록이지만, 이 기종은 전천후 폭격기로서 전생 말까지 폭격 임무를 충실히 수행했으며, 나중에 L3Y라는 이름의 10인승 수송기로 사용되었다. 1938년 20대의 수송형 G3M2가 2개의 일본 민간 항공사에서 사용하였다. 수송형 G3M2의 암호명은 티나(TINA)이다. 마지막 버전인 G3M3-23은 더 효율성 좋은 엔진과 늘어난 연료 용량성을 특징으로 생산되었다. 일본의 참전 시에 G3M은 특히 뛰어난 임무 수행 능력을 향상시켜 근대 항공기들과 함께 비행했던 이 기종은 총 1,050대가 생산되었다.
B-17플라잉 포트리스 (Flying Fortress)
만약 B-25 미첼(Mitchell)이 중형 폭격기로 이차 대전에 데뷔를 했다면 보잉의 B-17은 미국의 4발 전략 폭격기 중의 하나로 모두에게 기억되는 기종이다. 영화 멤피스벨 (Memphis Belle)의 주인공이기도 한 이기종은 육군 항공대의 기술 분과로 부터 요구된 설계 명세서를 기초로, 모델 299라는 프로젝트로 1934년 8월 16일 시작되었다. 유럽 지역에서만 291,508회의 출격으로 당시 모든 폭격기들의 우상이었으며, 그들이 유럽에 떨어뜨린 폭탄만해도 64만톤이 넘는 기종으로 2차대전 당시 폭격기의 왕자라는 칭호가 어울리지 않을까 싶다. 이들이 또한 격추시킨 적 항공기 수만도 유럽내에서 6,659대로 집결된 걸로 봐서 이들의 무장 역시 대단한 효과를 보았다고 할 수 있다. B-17의 시제기는 35년 7월 28일 첫 비행을 했으며, 13대의 선제기들은 6년 12월 부터 37년 8월 5일 까지 인도되었으며, 본격적인 생산은 39대의 B-17B를 시범적으로 주문하므로 다음해인 38년부터 시작되었다. 이것은 B-17에 있어 더 높은 최고 속력과 매우 증가된 상승 한도를 제공하는 터보 차지(turbocharged)엔진을 장착한 첫 생산이었다. 후에 생산된 B-17C는 20대가 포트리스(Fortress) I 이라는 이름으로 영국 공군에 인도되었고 ,적의 공격으로 인해 연료가 샐 경우 이를 자동적으로 차단하는 자동 밀폐식 연료 탱크와 무기, 무장을 교체한 B-17D와 E는 유럽 및 태평양에서 그 진가를 발휘했다. B-17E는 방어를 위한 1개의 0.30인치 12개의 0.50인치 기관총으로 무장하고 최대 7,983kg의 폭탄을 수송할 수 있는 그야말로 진정한 날으는 요새였다. 가장 광범위하게 제작된 기종은 시애틀의 보잉공장과 더글라스와 록히드 베가에서 만들어진 B-17G(8,680)이다. 프랫엔 휘트니사의 R-1820-97성형 엔진과 개선된 터보차져(turbocharger)는 B-17G를 10,670m의 고도에까지 오를 수 있게 했고 2개의 0.50인치 기관총을 탑재한 기수 아래 총좌의 추가는 독일 지역의 전략 목표에 대한 B-17의 주간 공격 수를 감소시키려는 독일 전투기 조종사의 상향 공격에 효과적인 방어가 기능하게 했다.
B-29 슈퍼 포트리스 (Superfortress)
2차 대전 중 가장 뛰어난 전략 폭격기라 평가되는 B-29슈퍼포트리스(Superfortress)는 세계 최초의 원자 폭탄을 히로시마와 나카사키에 투하하므로 전쟁을 종결시킨 기종으로 널리 알려졌다. B-29의 개발을 주도했던 연구는 1937년부터 시작되었으나 구체적인 디자인은 1940년에 나왔다. 보잉사는 1940년 초에 폭격 임무의 다양성에 따른 미 육군 항공대 (USAAF)폭격 편대의 요구에 대한 정보를 바탕으로 하여 장거리 중형 폭격기에 맞는 기체 제작에 힘쓰고 있었다. 콘솔리 데이티드 (Consolid-ated), 더글라스(Douglas), 록히드(Lockheed)사와의 경쟁에서 보잉은 XB-29를 내보였고, 이는 대단한 반향을 불러일으키며 채택되었다. 이는 폭격기 승무원들에게 좀더 나은 환겨을 제공함을 원칙으로 3개의 여압실을 보유하게 된다. 조종사와 폭격수, 일등정비사를 수용할 수 있는 비행실을 제공하고, 관측수와 폭격수를 위한 좌석을 마련했으며, 이는 폭탄실을 통해 연결된다. 나머지 여압실은 기수 후미 사격수에게 제공되어진다. 5개의 총좌에 10여개의 총이 설치되어 있고, 이중 4개는 원격조종이 가능하다. 당시 고익의 하중에 대한 고려로 인해 특별한 날개 단면과 이 착륙시 안전한 파울러형 (Fowler) 플랩을 적용하였다, 최초로 생산된 B-29의 인도는 43년 가을에 이루어졌으나 44년 6월 5일 이후에나 방콕 공격을 하므로 본격적인 폭격임무에 임했다. 10일 후에는 일본 본토폭격에 참가하게 된다. 그들의 최초의 작전은 인도 기지에서였다. 45년 1월 미국은 커티스르메이(Curtiss Le May)소장을 대 일본 폭격 사령부의 사령관으로 임명하게 된다. 그는 3월 일본에 대한 저고도 야간 폭격을 개시를 지시하게 되는데, 3월 10일에서부터 20일까지 감행된 이 짧은 폭격으로 인해 일본은 그들의 4개의 주요도시 약 83㎢ 의 지역이 파괴되었다. 그러나 그드은 결사 항전으로 맞서고 이는 비극적인 결말로 끝을 맺게 된다. 1945년 8월 6일과 9일 B-29에놀라 게이(Enola Gay)와 박스카(Bockscar)에서 투하된 원자폭탄으로 일본의 무조건 항복을 이끌어 내게 된다.
맺으며...
1945년 8월 7일 세이조 마리수에 장군은 히로시마의 피폭 상황을 기술한 그의 보고서에서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비행기가 히로시마 상공에 접어들었을 때 눈에 띄는 것은 검게 타 죽은 나무 한 그루 뿐이었다. 마치 이 도시에 까마귀가 한 마리 앉아 있는 것 같았다. 그 나무 외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공항에 내려보니 잔디가 마치 구워 놓은 것처럼 붉었다. 더 탈 것이라곤 없었다. 모든 것이 일시에 타 없어져 버렸던 것이다. ....... 도시 전체가 지워 없어진 상태였다." 그렇게 한 줌의 재와 함께 전쟁은 끝나 버렸다. 너무도 허무하게 말이다. 연합국 49개국과 추축국 8개국이 참전하여 1조 6,000억의 재산손실과 2,700만의 전사자를 낳은 2차대전은 이제 50주년으로 그 반세기를 넘어섰다. 이제 조금씩 그 아픔을 겪었던 전쟁세대들이 사라져가고 또한, 전범의 책임으로 둘로 나누어졌던 독일이 통일이 되는가 하면 핵무기의 희생물이 되었던 일본마저 경제 대국으로 커가면서 우리에게 조금씩 그 의미가 상실되고 있는 것이 오늘의 현실이다. 하지만 그 전쟁의 야욕으로 말미암아 무고한 시민들과 생명을 가진 모든 것이 순식간에 사라져 갔다는 것을 상기해 볼 필요가 있다. 우리도 그 피해자가 될 수 있으니 말이다. 이제까지 두번의 연재기사로 2차 세계대전의 명기들을 다루어보았다. 나름대로 2차대전을 재구성하여 가능하면 쉽게 독자들에게 다가가려 했으나 필자의 붓이 짧은 관계로 더 많고, 유익한 점들을 제시 못함이 아쉬움으로 남는다. 끝으로 나보다 더 나은 글로서 독자들에게 답할 수 있는 후배들에게 붓을 넘기며 그들의 무한한 가능성을 믿는다.
영화 JFK (0) | 2005.04.0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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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학교경찰제 & 미국의공포심 (0) | 2005.04.08 |
[펌] 2차대전당시 101공수사단의 유일한 한국인 (0) | 2005.04.0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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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대전이후 국제정세 (0) | 2005.04.06 |